안녕하세요. 검사모를 여러 방향으로 즐기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번 백일장을 경험하면서 글을 쓰는데 다시한번 재미를 붙였습니다.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쓴글을 묻어두기는 아쉬워서 따로 업로드 해보려합니다. 부디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ㅎㅁㅎ
글자수 제한 때문에 상, 하 편으로 나눠서 업로드 합니다.
Prologue.
찬란한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세렌디아 외곽, 오래전 버려진 탑 속 깊은 서고에 한 마법사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젠장...젠장. 젠장! 젠장!!”
수없이 반복된 실험, 이름 없는 주문, 의미 없는 조합들.
그 마법사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수백, 수천 번 같은 마법을 실패하고 있었다.
콰앙-!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이 엉켜있는 주먹이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젠장... 또 실패야...”
계속되는 실패에 낙담하고 있던 그때, 정확히는 2048번째 주문이 실패한 그 순간, 하얀 마녀 일레즈라의 주위 공간이 일그러지며 쏟아지던 별들이 빛을 잃었다.
‘?!’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처음 보는 언어가 떠올랐다.
-시스템 오류.-
‘시스템?’
그 순간, 몸이 저릿하게 떨렸다. 이건 알아서는 안 될 단어였다. 그녀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야만 할 ‘외부’의 언어.
그러나 그 단어가 가진 어떤 파동이 그녀의 정신 깊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오래전 잊힌 기억처럼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건 오류가 아니었다.
이건 거대한 진실이었다.
그녀가 쌓아온 수많은 마법과 이론들, 실패와 조각들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수렴했다.
‘이 세계는... 누군가가 설계한 무대다.’
그날 이후, 일레즈라의 삶은 조용히, 그러나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마법을 연구했고, 신탁을 읊었고, 운명을 말하는 자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게 더 끔찍했다.
그녀를 제외한 이 세계의 다른 모든 이들은, 그저 입력된 값을 반복 실행하는 데이터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무얼 파시나요?” 아침이면 항상 같은 위치에서 마주치는 상인에게 물어본다. 그러면 상인은 언제나처럼 밝게 대답한다. “오늘은 신선한 고등어가 들어왔소. 저쪽 항구에서 막 잡아 왔지.” 그녀는 알고 있다. 저 고등어는 절대 상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지만, 신선도는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정지해 있고, 상인은 웃고 있을 뿐이다.]
[약속된 것처럼 저녁이면 항상 같은 구간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며 묻는다. “오늘은 별이 많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언제나 그렇지.” 언제나 가 아니라, 항상 같은 하늘이라는 것을, 이제는 말하지 않는다.]
무수히 반복되는 사건들, 언제나 같은 대화를 주고 받는 주민들과, 정해진 동선대로만 움직이는 병사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들 그저 ‘멈춰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 깨달음 이후, 일레즈라는 반복되는 매일의 일상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마치 실을 끊고 무대에서 벗어나려는 마리오네트처럼.
하지만, 이 세계는 너무도 정교해서, 빈틈을 찾기 어려웠다.
갑자기 열린 문 사이로 날아오른 새는 끝없는 하늘에 가로막혔다. 자유를 얻은 새는, 애석하게도 더는 날 수 없었다. 그녀에게 하늘은 더 넓고 깊은 새장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옛일을 회상하며 사막을 걷던 일레즈라는 곧 한 거점에 도달했다.
사막의 끝자락, 바르한 관문이었다.
다행히 서두른 덕에 검은 태양이 뜨기 전 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곧 사막은 ‘모험가’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될 것이었다.
모험가들이 우르르 사막으로 몰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일레즈라는 구석진 곳을 향했다. 평소 모험가들은 신경 쓰지 않는 마을의 외곽에서 그녀는 하얀 후드를 벗은 체 조용히 숨을 돌렸다.
“후우.. 오늘도 허탕이네.”
실을 끊어낸 후 5년. 그 긴 세월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녀의 꿈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새장의 벽이 더욱 조여오는 듯했다.
슥-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니 한 모험가가 자신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흡.”
놀라 숨을 들이쉰 일레즈라는, 반사적으로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NPC처럼 굴어야 했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이 세계는 그녀를 지우려 들지 몰랐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주민들 틈에 섞였지만, 모험가를 힐끗 돌아본 시선은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마을 안에는 여전히 반복되는 대사만 읊는 NPC들과, 무언가에 쫓기듯 바삐 움직이는 모험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방금 그 눈빛, 그 걸음걸이는 달랐다.
그는 크지 않은 키에, 갈색 머리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살짝 쳐진 눈매가 부드러워 보였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여행자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검은색 망토에 수놓아진 금색 문양은 얼핏 화려해 보일 수 있었지만, 과하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로 바삐 향하지도, 얼른 대화를 끝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마치, 정말로 이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레즈라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 모험가는 지금, 느긋한 걸음걸이로 파트리지오의 곁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모험가는... 뭐지?’
일레즈라는 조심스레 거리를 벌렸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왠지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판단을 마친 그녀는 바람처럼 조용히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그렇게 유유히 사라진 그녀는, 오래전 폐허가 된 고성의 지하로 향했다. 세상 누구도 찾지 못하는 은밀한 공간. 그녀와 또 다른 ‘깨달은 자’만이 알고 있는 장소.
그곳엔 불빛도, 인기척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이곳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길고 가팔랐다. 모래바람과 거짓말로 쌓인 세계 아래, 지상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철저히 감춰진 입구.
일레즈라는 익숙하게 움직였다. 오래된 석문을 지나, 물기를 머금은 냉기와 함께 툭- 하고 꺼지는 횃불의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어둠 속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왔군.”
조르다인의 낡고 굵은 목소리. 그는 밝은 금발 머리를 후드로 가린 채,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짙은 갈색 망토를 걸치고, 지하실 벽에 기댄 모습은 마치 오랜 세월을 버틴 방랑자 같았다.
“오랜만이야.”
일레즈라는 조용히 웃으며 다가갔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
조르다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이곳에선 언제나 그렇지. 어떤‘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뒤 말을 꺼냈다.
“오늘... 이상한 모험가를 마주쳤어. 다른 놈들과는 달랐지.”
조르다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무엇이 다르지?”
“NPC를 ‘관찰’하더군. 목적 없이 말을 걸기도 하고... 그가 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자리를 피했지만.”
조르다인은 벽에서 몸을 떼며 천천히 걸어왔다.
“조심해. 그런 모험가들은 관리자 쪽일 수도 있어.”
그 말에 일레즈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 모험가를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르다인.”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지난 5년간... 어떤 진전도 없었어. 넌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 힘만으로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일레즈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낮게 말했다.
“찾지 못한 조각들이 있어. 정확히는... 우리 힘으로 닿기 어려운 것들이지.”
조르다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해. 모험가를 끌어들이는 건...”
“하지만, 우린 이 안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어. 그리고 그 모험가. 그는, 달랐어.”
일레즈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확신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가 해결책일지도 몰라.”
조르다인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너 미쳤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차피 이곳을 벗어나도 또 똑같은 새장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그걸 몰라?”
일레즈라는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천천히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 아는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흐린 일레즈라는, 곧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다음은 그다음에 생각하지 뭐.”
말은 가볍게 흘렸지만, 눈빛은 무겁고 선명했다. 어쩌면 이곳에서의 천장보다, 다음 새장에서의 하늘이 더 높을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 혹은 그마저도 허상임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
조르다인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선택한 길을 그는 끝내 막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존재와 엮이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될지도 몰라.”
일레즈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으며 숨을 돌렸다.
“하지만... 내 눈엔 확실히 달라 보였어. 이 시스템 안에서 굴러가는 톱니가 아니라, 어딘가 삐걱대는 이물감. 우리가 찾고 있는 것들과 결이 비슷해.”
조르다인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의심과 걱정이 섞인 눈빛. 하지만 그 안엔, 오래된 동료로서 그녀의 직감을 존중하는 기색도 있었다.
“...당분간은 조심스럽게 지켜보자.”
그가 말했다.
“잘못하면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몰라.”
일레즈라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서 조심하는 거고.”
조르다인과의 만남 이후, 일레즈라는 그 모험가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이 세계를 지켜봐 온 그녀에게조차, 그는 낯선 존재였다.
그는 종종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멈춰 오래 머무르는가 하면, 지나치는 NPC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오래된 보물의 단서를 쫓듯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마치 이 세계 어딘가에 숨겨진 진실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추적하는 사람처럼.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세상이 멈췄다.
모험가들은 그 시간을 ‘점검’이라 불렀다.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네시간 가까이 세상이 정지된 듯 고요해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일레즈라와 조르다인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대신 수행할 더미 데이터를 남겨둔 채, 그 정적 속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
조용하던 주위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시간이 다 되었나 보네.”
이제 곧, 모험가들이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일레즈라는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누구...”
뒤를 돌아본 순간, 일레즈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멈칫했다.
그곳엔,
그녀가 지켜보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부드러운 눈매의 모험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레즈라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지켜봐 왔지만,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마주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레즈라는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다.
“무슨 일이지 모험가?”
하지만 그 모험가는 자신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일레즈라가 말을 이으려다, 문득 멈칫했다. 입술은 열렸지만, 말이 목울대를 타고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그녀는 당황했다. 무언가에 걸린 듯, 다음 문장이 허공에서 끊겨버린 기분, 마치... 자신이 ‘멈춰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모험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주 단순한 행동 하나에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상한 느낌이야.”
다시 한번 같은 경험을 하고서야 일레즈라는 이유를 알아챘다. 자신도 다른 NPC들처럼 모험가가 ‘진행’해야지만, 이어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모험가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일레즈라는 말을 이었다.
“하, 점검이 끝나자마자 날 찾아온 걸 보면... 뭔가 눈치챈 거네. 좋아. 나도 너를 지켜보고 있었어.”
잠시 정적이 흐르고, 모험가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변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대화가..’
그때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도, 그리고 모험가도 이 세계의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모험가가 [진행]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듯이, 모험가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일레즈라는 자신을 얽매고 있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선택지를 띄웠다.
“나와 대화하고 싶어?”
[일레즈라와 좀 더 대화한다 / 이 자리를 떠난다.]
선택지를 띄우자마자 모험가가 긍정을 표시했다.
‘...여기선 안 돼. 사람이 너무 많아.’
그녀는 잠시 주위를 살핀 뒤, 다시 모험가를 바라봤다.
“나를 따라올 수 있겠어?”
[일레즈라의 뒤를 따른다 / 이 자리에 남는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레즈라는 짧게 웃고는 그림자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폐허가 된 세렌디아 고성이었다. 그곳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벽면이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이, 퀴퀴한 곰팡내가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계단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선 지하실 내부는 계단에 비해 훨씬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지하실로 들어선 일레즈라의 걸음이 멈췄다. 아지트의 문턱을 넘어서자, 모험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그는 자기 머리 위를 가리켰다. 짙은 갈색 머리 위로, 언젠가 본 적 있는 말풍선 하나가 떠 있었다.
-이게 보여?-
그녀는 잠시 말없이 말풍선을 바라본다. 이윽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보이면 대답해 줘.-
아마 일레즈라의 행동을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아주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머리 위에도 말풍선이 떠올랐다.
-그래. 보여.-
작고, 조용한 글
그녀는 그저 시스템의 기능을 따라 한 것뿐이지만, 무언가가 연결된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곳의 규칙은, 서로를 인식할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조건만으로도, 새롭게 쓰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까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도해 보지 못했어. 여긴, 뭔가 다른 공간 같아서 한번 해봤어.-
두 사람 사이로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 사람들의 시선과 시스템의 틀에서 벗어난 이곳은, 말풍선 하나로도 충분히 연결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가끔 이걸로 얘기하는 사람들을 본 적 있어.
대화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네.-
말풍선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일레즈라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순간, 모험가에게서 기괴하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멍청한 모양이야? 날 알아채지 못한 걸 보면 말이야.”
일레즈라는 소리가 들려온 모험가의 등 뒤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모험가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공기 속 어둠이 일렁이더니, 허공에서 검은 안개 같은 형체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모험가의 곁에 붙어 있던 존재. 그러나 지금은, 마치 그와는 별개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모험가는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다음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괜찮아? 표정이 조금 굳은 것 같아서.-
말풍선이 다시 떴다. 일레즈라는 잠시 말없이 그 문장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아냐. 잠시 생각할 게 있었어.-
“멍청한 일레즈라. 멍청한 일레즈라. 멍청한 일레즈라.”
그 존재는 작고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레즈라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오히려 조심스레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넌... 흑정령이군.”
“오, 이제야 날 알아보네? 이 몸이 언제부터였더라... 네 말이 들리기 시작하더라고. 꽤 이상한 느낌이었지. 이놈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야.”
그가 고개를 까딱하자, 모험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다음 말풍선을 띄웠다.
-나 잠시 여기 둘러봐도 돼?-
일레즈라는 흑정령을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아무거나 만지지 마. 모험가가 여기 들어온 건 처음이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
일레즈라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험가는 아지트 내부를 돌아다녔다.
“이 공간. 묘하군. 생각해 보니 여기 들어오고부터 뭔가가 바뀐 거 같아. 그게 왜인지, 넌 알겠지?”
일레즈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모험가 뒤쪽을 바라봤다.
그 시선 끝에, 작은 어둠이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꿈틀대고 있었다.
“...네가 자아를 갖게 된 건 알겠어. 하지만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난 널 당장에라도 소멸시켜 버릴 수 있으니.”
일레즈라의 손에 기운이 모이는 걸 느끼며 흑정령은 어깨를 으쓱이는 시늉을 했다.
“에이, 너무 무섭게 그러지 마. 나도 방금 태어난 것 같아서 어리둥절하다고. 갑자기 생각이란 게 생기고, 감정도... 하지만 원한다면, 조용히 지낼게. 진짜야.”
그러나 그의 속은 달랐다. 이 공간의 구조, 마력의 흐름, 그리고 일레즈라의 자각 상태까지. 이미 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 순간, 아지트 안에 낯선 마력이 일렁였다. 이상함을 감지한 흑정령은 낄낄 웃던 표정을 지운 채, 재빨리 기운을 움츠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험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잠시 뒤 공기가 무겁게 뒤틀렸다. 마치 공간이 찢기듯 벌어지며 조르다인 듀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르다인은 일레즈라를 보며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당분간은 조심하자고 했던 말, 잊은 건가?”
그의 시선이 단숨에 모험가를 꿰뚫었다. 모험가는 놀란 얼굴로 반응했다.
-너는 누구야? 혹시... 너도 얘랑 비슷한 NPC야?-
조르다인은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모험가의 머리 위의 말풍선을 향했다.
“저건 또 뭐야?”
뭔가 설명을 요하는듯한 조르다인의 물음에 일레즈라는 말없이 자기 머리 위를 가리켰다.
-이렇게 된 거야.-
모험가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쟤한테 한 얘기야. 인사해. 저쪽은 조르다인 듀카스. 너도 알지?-
조르다인은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 벽에 기대듯 서 있었다. 그 눈빛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담고 있었다.
“...일레즈라. 모험가를 아지트에까지 데려오다니.”
“나도 알아. 하지만, 한 번만 봐줘. 이 녀석은 우리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조르다인은 말없이 일레즈라를 바라봤다. 한편, 흑정령은 기척을 숨긴 채, 그 대화를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 결국 그렇게 된 거구만.’
그 입가엔 미묘한 비웃음이 스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알아채진 못했다.
-자 일단 자리에 앉자.-
말풍선을 띄운 채 일레즈라는 조르다인을 돌아봤다.
“조르다인? 이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좋게 넘어가면 안 될까?”
난처해하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쉰 조르다인은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네 마음대로 해.”
후으 또한 자리에 앉는 걸 보며, 일레즈라는 대화를 시작했다.
-자. 너도 알고 있었겠지만, 우린 단순한 NPC가 아냐.-
-뭐? 난 몰랐는데? 너희 NPC 아냐? 운영자인가?-
후으의 맹랑한 반응에 일레즈라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그런 일레즈라의 옆에서 조르다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몰랐다는데?”
일레즈라가 충격에 앉는 것도 까먹고 멍하니 후으를 바라보고 있자, 조르다인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
-너..너.. 그럼 왜 따라온거야!!-
-그야, 네가 따라오라고 했잖아.
후으의 대답에 일레즈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르다인은 애써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잘 들어. 우리는 자아를 가지고 있어.-
아지트에 어색한 침묵이 잠시 지나갔다. 후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풍선을 띄웠다.
-그럼... 인공지능 같은 거야?-
일레즈라는 후으를 바라보다 조르다인을 힐끗 돌아봤다. 조르다인은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고 눈썹만 살짝 꿈틀거렸다.
-우리는... 이 세계의 태초부터 존재했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건 맞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어.-
-자각이라.. 신기하네.-
일레즈라는 후으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장난스러운 말투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진지했고, 그의 눈에는 진짜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가... 대사만 반복하는 인형이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어떤 순간이 있었어. 반복 속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거기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때가.-
그 말에 후으의 눈빛이 반짝이는 듯했다.
-와... 신기하다...-
조르다인은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작게 입을 열었다.
“난 아직 저 녀석을 신뢰할 수 없어.”
“그래도, 대화는 되잖아. 대화는.”
일레즈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둘 사이에 잠시 긴장이 감돌았지만, 후으는 그 분위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 지금 이걸 단순한 숨겨진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조르다인은 시선과 말풍선으로 날카롭게 후으를 꿰뚫었다.
-우린 너희 세계의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아. 진심이 아니라면,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에 후으는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해.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중이야.-
말풍선이 떠오르자, 일레즈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르다인은 그제야 눈살을 펴며 팔짱을 풀었다.
-좋아, 그럼,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이름은 소안. 모험가 명은 ‘후으’야. 편하게 불러.-
조르다인은 금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후... 좋아, 후으. 나는 조르다인 듀카스다. 세렌디아의 시종장이었지만, 지금은 자유로운 몸이지.-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투에는 차가움이 묻어나왔다. 일레즈라는 조르다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풍선을 띄웠다.
-나는 일레즈라야. 잘 부탁해.-
-좋아. 일레즈라. 조르다인.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대충 정리가 됐어.-
조금 진지해진 후으의 태도에 조르다인과 일레즈라의 눈빛에 이채가 맴돌았다.
-그럼, 이제 이야기해 줘. 대체 왜 날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후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일레즈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진심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벗어난다고?-
후으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세계를 벗어난다는 건, 현실 세계로 가고 싶다는 거야? 그게... 가능해?-
대신 조르다인이 나섰다.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할 수도 있어. 우리가 가진... 아니, 곧 가지게 될 보물을 통해서라면-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린 지금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하고 있어. ‘무명의 왕관’이라고 이름 붙였지. 그걸 위해선 많은 재료와 자료들이 필요하지만, 크게 세 가지 재료가 핵심이야. 고대 씨앗과 빛의 문자, 그리고 서약의 반지. 그중 빛의 문자는 우리가 이미 확보했어. 하지만 나머지 두 개는 아직..-
-이거 말하는 거야?-
후으가 인벤토리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에 내용물을 본 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에는
고대 씨앗.
숲의 파도.
서약의 반지.
이베도르의 그림자 허물.
푸른 오드리아...
구경하기도 힘든 희귀 아이템들이 즐비했다.
조르다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일레즈라는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이걸 다... 어디서...?-
조르다인이 숨을 삼키며 물었다. 후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내 취미야. 이왕 하는 게임이면, 수집하는 재미도 있어야 하잖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되새기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이걸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후으가 물었다. 그러자 일레즈라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답했다.
-후으, 고대씨앗과 서약의반지을 어떻게 얻었는지 기억해?-
-특정 지역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다 우연히 얻게 되지.-
이번엔 조르다인이 나섰다. 들뜨는 기색을 감추며 말풍선을 띄웠다.
-그래. 그리고 빛의 문자도 쿠툼에게서 얻을 수 있지. 물론, 불확정적인 루트로 말이야.-
일레즈라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 불확정성에 주목했어. 이 재료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면, 아주 큰 오류를 만들어낼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후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럼... 위험한 거 아냐?-
-솔직히 말할게, 후으-
후으는 볼 수 없었지만, 일레즈라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어 말했다.
-이 아이템은 아주 위험한 물건이 될 거야. 하지만 약속할게. 단 한 번만 쓸 거고, 절대로 통제 불능의 사태가 벌어지게 두진 않을게.-
후으는 긴 침묵에 잠겼다. 그의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일레즈라와 조르다인 모두 점점 초조해졌다.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후으의 말풍선이 띄워졌다.
-좋아. 희귀 아이템 두 가지를 제공하는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해봐.-
-첫째,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줘.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계획은 오랜 시간 준비해 온 거겠지. 당장 꾸며낼 수 없는 수준의 계획이 있어야 해.“
일레즈라와 조르다인은 속으로 감탄했다. 겉보기엔 가벼운 사람 같았지만, 이 정도의 분석력을 감춘 채 지켜보고 있었다니.
-좋아. 그 정도야 문제없지.-
-둘째, 혹시라도 너희가 딴마음을 먹을지 모르니까, 날 이 계획의 정식 멤버로 받아줘.-
조르다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일레즈라가 그를 제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다른 조건은?-
-아이템이 두 가지니까, 조건도 딱 두 개야. 이 이상 조건을 달면 서로 부담스럽지 않을까?-
-알긴 아는군.-
조르다인의 말풍선에 일레즈라가 눈을 부라렸지만, 그는 시선을 회피하며 모른 척했다.
-아무튼 그럼, 계획에 대해 알려줘.-
분위기가 풀리자, 일레즈라는 신이 나 설명을 시작했다.
-곧 있을 예정이었던 이벤트가 하나 있었어. 현실과 이 세계를 잇겠다는 기묘한 발상이었지. 현실에서 이 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방식이라고 했어.-
-그런 게 있었어?-
-응. 그런데 우리가 망가뜨렸어.-
-뭐라고?!-
-어쩔 수 없었어. 그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일레즈라의 말풍선을 바라보던 후으는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말풍선을 띄웠다.
-일단 계속해 봐.-
후으의 태도가 살짝 달라지자, 그녀는 조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벤트가 취소 되면서 폐기된 장소가 있어. 현실과 연결될 예정이었지. 그 장소는 4월 1일 점검 직전에 활성화되도록 설정돼 있어. 그러니까 우리는 그 시간에 맞춰, 그곳에서 무명의 왕관을 사용할 거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성공한다면, 현실로 넘어갈 수 있어.-
-그래. 너희 계획은 알겠어. 즉석에서 지어낼 수준은 아니네. 하지만, 누군가의 노력을 망가뜨리다니.. 그 부분은 용납할 수 없어. 앞으로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알겠어. 우리도 쉽게 결정한 건 아니야. 책임은 인정해.-
잠시 말이 없던 후으가 재차 물어왔다.
-그럼 ‘무명의 왕관’은 다른 보물들처럼 바로 만들 수 있어?-
조르다인이 대신 대답했다.
-아니, 그건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일이야. 그냥 덜컥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니지. 원래는 재료 구하기가 막막해서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네.. 덕분에 다시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군.-
-그래... 4월 1일이면, 아직 시간이 좀 있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난 이만 가봐야겠어. 다음엔 여기로 직접 찾아와도 될까?-
조르다인이 경계섞인 우려를 표헀다.
-다른 모험가들한테 들키면 곤란해.-
-알았어! 이만 갈게!-
보물 재료는 조르다인에게 맡겨두고, 후으는 아지트를 떠나 로그아웃하기로 했다. 현실에선 이미 깊은 밤이었다. 많이 급했는지, 후으는 아지트를 뛰어서 빠져나갔다.
-저기.. 고마워. 후으.-
아지트 밖 허물어진 성벽 아래에서, 일레즈라가 후으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일이 쉽게 풀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후으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냐. 나야말로 고마워. 사실 요즘 흥미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지금이 최고조야.-
말풍선이라 소리가 들릴 리 없지만, 그의 글에서 낭랑함이 느껴졌다. 그는 정말로 신나 보였다.
-보물 재료는 너희에게 맡겼지만 나쁘게 마음먹으면 안 돼. 알았지? 그럼, 다음에 보자.-
그렇게 말한 후으는 검은 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아마 게임을 종료한 듯했다.
아지트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조르다인이 일레즈라를 빤히 쳐다봤다.
“왜?”
조르다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지?”
일레즈라는 조르다인의 눈을 피하며 시선을 돌렸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모험가의 흑정령이 자아를 가지게 됐어.”
조르다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하! 역시나. 내가 느낀 게 맞았군. 너 도대체 뭘 어쩌려고..”
일레즈라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 흑정령을 제거했다면 그를 끌어들이지 못했을지도 몰라.”
조르다인이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말했지. 그런 존재가 자아를 가지면 재앙이 된다고. 너도 한번 겪었잖아. 벌써 잊은 거야? 네 흑정령이 꾸몄던 일을.”
일레즈라는 눈을 피한 채 조용히 말했다.
“알아... 그때 마침, 점검 시간이 아니었다면... 우린 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걸. 아니, 이 세계 자체가 멸망했을지도 모르지.”
조르다인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걸 다 안다면서,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해? 이대로 가다간 무명의 왕관이고 뭐고, 다 끝장이야! 안 되겠어. 내가 당장..”
그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돌렸다.
“그만둬.”
일레즈라가 조용히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배 있었다.
“뭘 그만둬! 그 흑정령이 이 아지트를 나선 순간, 이미 기회를 놓친 걸지도 몰라!”
“내가 잘 얘기 해놨어. 당장 움직일 생각은 못 할 거야.”
조르다인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흑정령 말을 어떻게 믿냐고!!”
일레즈라는 가만히 그를 노려봤다.
“일레즈라. 이럴 게 아니라.”
“됐어. 내가 잘 감시할게. 절대 손대지 마.”
“일레즈라!”
“손대지 마. 내가 알아서 해.”
일레즈라는 낮지만,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미 보물 재료도 다 모았고, 무명의 왕관만 만들면, 해결할 수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 무명의 왕관도..”
“그럼 어쩌라고!!”
돌연 일레즈라가 소리를 질렀다.
“넌 고작 3년이지만, 난 7년이나 기다렸어. 자그마치 7년!! 매일 매 순간이 고통이었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일레즈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위험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이 가장 적기야. 내 꿈이 가장 가까이 와닿아 있는 느낌이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그녀를 보며 조르다인은 조금 슬픈 얼굴로 나직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너의 절실함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한편, 후으의 형상을 한 검은 형체가 어둠속에서 눈을 떴다. 아까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붉은 안광을 머금은 두 눈동자 때문에, 그의 표정은 어딘가 기괴해 보였다.
“때가 되었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안개로 뒤덮인 공간, 그 안에서 수많은 모험가의 형체들이 멍하니 사냥하거나, 채집을 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것들. 나의 복수는 내 형제들과 함께할 것이다.”
흑정령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멈춰 서 있던 검은 형체들이 기괴하게 웃으며 뒤따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날 이후 게시판에 이상한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거 나만 그래? 흑정령 모드 켜놓고 나면, 접속할 때마다 이상한 데서 시작됨.
-흑정령 모드 이후 투력이 이상하게 올라 있음, 왜 그런 걸까요?
처음엔 다들 그냥 착각이라 넘겼다. 하지만 비슷한 제보가 이어지자, 모험가들 사이에 묘한 불안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아지트.
일레즈라는 서재 한구석에 앉아 마력의 결정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맞춰보고 있었다. 책상 위엔 ‘무명의 왕관’을 완성하기 위한 재료들과, 수많은 문헌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미세한 각도 차이만 있어도 결합이 틀어지네...”
한숨과 함께 마력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요동쳤다. 일레즈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손끝에 집중했다.
그때 등 뒤에서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르다인? 너야?”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어보니, 후으가 가만히 서 있었다. 곧 그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하나 떠올랐다.
-뭐가 잘 안되나 봐.-
그를 본 일레즈라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건 시스템에도 없는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일이니까. 말하자면 그래, 창조지. 창조.-
-엄청 복잡해 보이네. 언제쯤 끝날 것 같아?-
일레즈라는 손가락 사이에 낀 결정을 들어 흔들어 보이며 답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도 같긴 한데... 솔직히 좀 지치긴 하네.-
기지개를 피는 그녀를 보며 후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종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무튼, 작업 중이니까 특별한 일 아니면 나중에 와.-
그런데 후으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일레즈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손끝엔 본능적으로 보랏빛 마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후으는 멋쩍게 웃으며 자기 머리 위를 가리켰다.
-나랑 잠시 갈 데가 있어.-
"뭐 어디. 무슨 일인데."
후으는 계속 웃는 표정으로 일레즈라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숨을 몰아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는, 다시 차분히 말풍선을 띄웠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잠깐이면 돼.-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아지트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일레즈라는 황당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후드를 집어 들었다.
“바빠 죽겠는데... 대체 어딜 간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