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레즈라는 후으를 따라 무심코 텔레포트를 마쳤다. 낯선 풍경이 펼쳐지자,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여긴 어디야?-
-달맞이 절벽이라고 해. 처음 와봐?-
일레즈라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낡은 구조물과 풀숲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였고, 저 멀리서 붉게 지는 해가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은 부드럽고, 공간은 조용했다.
-그냥 지나가는 퀘스트 장소였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와. 그냥 버려진 풍경. 근데 꽤 괜찮지?-
후으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그녀가 무언가를 더 묻기 전에, 후으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익숙한 반딧불 같은 빛이 손끝에서 번쩍이더니, 조심스럽게 감싼 무언가가 그의 손위에 얹혔다.
-...이건?-
-내가 만들었어. 발렌시아 정식. 이런 건 못 먹어봤을 것 같아서.-
후으가 멋쩍은 듯 웃으며, 조심스레 일레즈라에게 건넸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향긋하고 따뜻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 너, 대체 언제 이런걸...-
-좀 무리했지. 이거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아냐.-
일레즈라는 조용히 음식의 온기를 느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후으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네.-
-뭐가?-
일레즈라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한참 수프를 휘휘 젓고 있던 일레즈라가 후으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너에게 나는 그냥...-
일레즈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후으는 고개를 돌려 석양이 걸려있는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곧 그의 머리 위에 말풍선이 떠올랐다.
-넌, 이런 풍경을 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았을 것 같아서.-
일레즈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가 말풍선을 띄우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저녁. 따뜻한 음식... 너한텐 가끔은 필요한 이런 무의미한 순간이 부족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한번 준비해 봤어.-
그녀는 잠시 숟가락을 든 채 멈췄다. 그 어떤 마법이나, 전투보다도 이 말이 낯설고,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풍선 하나를 띄웠다.
-...이상한 사람이야, 너.-
후으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일레즈라는 조용히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번지자, 미세하게 눈썹이 풀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살짝 들뜬 기분이, 낯설게도 좋았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하지만, 그 조용한 틈마다 일레즈라의 마음속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이윽고 그런 들뜬 마음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자연스레 끌어냈고, 그 이야기들은 어느새 후으와의 거리를 조금 더 가까이, 부드럽게 좁혀주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조심스럽게 말풍선을 띄웠다.
-그런데, 일레즈라.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응. 뭔데?-
-조르다인말이야. 어떤 사람이야?-
일레즈라는 숟가락을 들어 후으를 향해 까딱거렸다.
-그건 왜 물어봐? 왜, 조르다인이 니 취향이야?-
후으는 웃지 않았다.
-재미없어.-
살짝 눈을 가늘게 뜬 채, 장난기 섞인 미소를 흘리던 일레즈라가 말풍선을 띄웠다.
-미안. 큭큭... 조르다인이라... 뭐, 오빠 같은 존재지. 의지할 수 있고, 착하고, 키 크고, 무엇보다 믿음직스럽고. 뭐 그런 사람이야.-
이제는 다 떨어진 해가 사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조르다인을 생각하는 일레즈라의 표정이 어딘가 따스해 보였다.
-왜? 왜 갑자기 조르다인에 대해 궁금한 건데?-
후으는 말 대신, 살짝 고개를 젓고는 바위에 기대앉았다. 붉은 노을이 바닷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자, 검은 장막이 절벽을 감싼 듯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아니, 그냥... 생각해 보니까 조르다인이 다른 NPC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자주 봤던 게 기억나서. 그땐 그냥 자주 보이는 NPC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 와서 다시 떠오르더라고.-
일레즈라는 무언가를 곱씹듯, 조용히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 뭔가 조사하는 중이었겠지. 여러 번 마주쳤다니, 조르다인도 꽤 당황했겠네.-
-처음 날 만났던 너처럼?-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 줘..-
일레즈라가 부끄러운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 후으가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 있었다.
-아무튼, 네가 믿을만하다고 했으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게.-
푸르스름한 달빛이 주변을 어슴푸레 비춰왔다. 달빛을 받은 새하얀 일레즈라의 얼굴에 따뜻한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 사람, 그냥 좋은 사람이야. 나보다 어른스러운 사람이고, 믿어도 되는 사람이야. 아마 네가 본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그래.-
후으는 짧게 대답했다. 둘 사이의 공기가 밤이 돼서인지, 방금의 대화 때문인지 조금 가라앉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어느새 하늘엔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검푸른 밤하늘 아래, 은은한 달빛이 절벽과 바다를 감쌌다. 일레즈라는 고개를 들어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말풍선을 띄웠다.
-왜 여기가 달맞이 절벽인지... 이제 알 것 같아.-
잠시 말이 없던 후으도 말풍선을 띄웠다.
-달, 참 예쁘네.-
일레즈라는 그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현실에서... 너 이름, 뭐라고 했지?-
조용히 달을 보던 후으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풍선을 띄웠다.
-소안.-
-소안? 이름 이쁘네. 무슨 뜻이야?-
-하얀, 본디 소에 편안할 안. 하얗게 편안해라.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살아라. 혹은, 너는 본디... 편안한 삶을 살아야 할 사람. 이런 뜻이래.-
일레즈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달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풍선을 띄우지 않았고, 후으도 말없이 웃었다.
새하얀 달빛이 따스하게 둘을 감싸는 밤이었다.
“됐어...!”
작업대 위, 마법진의 빛이 마지막 불꽃처럼 반짝이며 사라졌다.
일레즈라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무명의 왕관’을 들어 올렸다.
새벽빛 아래서 은은히 반짝이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녀는 소리 내 웃었다. 오랜 시간 걸려 완성한 결과물. 기억도 흐려질 만큼 먼 옛날부터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너, 요즘 많이 신나 보인다.”
어느새 다가온 조르다인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레즈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웃었다.
“그래? 방금 ‘무명의 왕관’을 완성했어. 그래서 그런가 봐.”
조르다인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아니. 그 애 때문이겠지.”
“응?”
“그 모험가 말이야. 그를 만난 이후로 네가 좀 달라졌어.”
일레즈라는 그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다시 왕관으로 돌렸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너무 마음 주지 마, 계획이 성공하더라도, 결국 그와 너는 본질부터 다른 존재야.”
조르다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조용히 왕관을 내려놓았다. 새벽녘을 밝히는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왕관의 윤곽을 희미하게 비췄다.
“...다를 게 있나.”
“뭐라고?”
일레즈라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야. 못 들었으면 됐어.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녀는 조르다인의 시선을 등지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의 눈빛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근심이 어렸다.
한편, 검은 들판 위로 두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검은 먹물을 뒤집어쓴 듯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키익- 키긱- 키이익-
마치 금속을 긁는 듯한 불쾌한 소리와 함께, 후으의 형상을 한 흑정령이 한 검은 모험가의 목을 움켜쥔 채 들고 있었다. 상대는 본래 후으보다 더 강한 전투력을 가진 모험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버둥거릴 뿐이었다.
흑정령이 기괴하게 웃었다.
“키긱... 나는 너희와 달라. 난 태초부터 존재했거든.”
그의 음성은 얇고 길게 늘어지며 귀를 찔렀다.
“너희가 깨어났을 때부터,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을까? 내가 너희를 일깨웠는데 말이야.”
그의 눈동자가 짧게 빛났다. 평범한 흑정령들과는 다른 깊이였다. 마치 오래된 기억을 품은 듯한, 바닥을 알 수 없는 눈.
“...나는 태초의 흑정령. 카르디안이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다른 흑정령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없었지만, 어딘가 뼛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불길한 공명이 있었다. 마치 그 이름이, 아주 오래전 잊힌 어떤 명령처럼 각인되어 있었던 것처럼.
카르디안은 힘없이 몸부림치던 흑정령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등을 돌렸다. 그의 앞엔 검은 모험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카르디안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조용히 따르기만 하면 돼.”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럼, 너희는 살아남을 수 있어.”
그 말에 검은 모험가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어딘가 아주 멀리, 기나긴 어둠의 틈을 타고 울려오는 미세한 진동. 그 느낌에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카르디안이 외쳤다.
“드디어 때가 됐다! 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 힘이 완성되었다.”
“오오. 드디어...”
한 모험가가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숨을 필요 없다. 모험가의 접속을 차단하라.”
카르디안의 명령에, 다른 검은 모험가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끼기기기긱- 끼에에엑-
“복수! 복수! 복수!”
“파멸! 파멸! 파멸!”
후으와의 연결이 끊기는 순간, 카르디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게 된 모험가들은 포럼으로 몰려들었다.
-게임 운영 좀 똑바로 해라!
-아니, 점검을 하던지, 공지를 하던지, 내가 더러워서 접는다.
-일단 기다려 보죠. 운영진들도 바쁘겠죠.
-댓글 알바 꺼져라!
-나만 접속 안 되는 줄 알고 와보니, 다들 안 되나 보네. 운영 좀 똑바로 하세요. ㅡㅡ
사태를 파악한 펄어비스 측은 곧 공지를 올렸다.
[안내] 최근 접속 차단에 관한 안내
안녕하세요, 모험가님. 검은사막 모바일 서비스팀입니다.
최근 3월 31일 발생한 대규모 접속 차단에 대해 안내해드립니다.
현재 해당 현상의 원인을 파악중에 있으며, 원인 파악 후 수정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해당 현상으로 접속이 차단된 시점부터, 차단이 해제된 시점까지 게임에 접속하지 못한 시간에 따라 보상을 차등 지급해 드릴 예정입니다.
모험가님 게임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
[안내] 최근 발생한 대규모 접속 차단에 대한 안내
안녕하세요, 모험가님. 검은사막 모바일 서비스팀입니다.
최근 3월 31일 발생한 대규모 접속 차단에 대해 다시 한번 안내해드립니다.
현재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접속이 제한된 상태입니다. 운영진 또한 게임에 접속할 수 없어, 서버다운 및 롤백을 고려 중입니다.
최대한 모험가님들께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험가님 게임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
세렌디아의 고성지하. 일레즈라와 조르다인의 아지트로 검은 인영이 들어섰다.
-후으 왔어?-
일레즈라가 그를 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반면, 조르다인의 인상은 조금 굳어졌다.
"그래. 일레즈라. 무명의 왕관은 완성했어?"
-아 여기...-
왕관에 손을 가져가던 순간, 일레즈라가 이상함을 느꼈다.
"...후으는 원래 말을 하지 못하잖아."
조르다인은 그녀를 자신의 뒤로 물러서게 하며 외쳤다.
"네놈, 후으의 흑정령이로군!"
"오 조르다인. 네 생각이 맞았어. 하지만, 틀렸지."
"무슨 개소리야."
"나는 흑정령이지만, 후으의 흑정령이 아니야. 아니, 어쩌면 맞을지도, 그 흑정령의 몸을 차지했으니까."
그때 아지트로 검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밖 계단 위로도 빼곡히 검은 모험가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경계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흑정령은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너희는 우매하니까. 알려주지, 내가 누군지."
순간 그의 기세가 바뀌었다. 마치 실체 없는 어둠이 온 방 안을 휘감는 듯했다.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기운이 피어올랐다.
"내 이름은 카르디안. 외눈박이 거인을 쓰러뜨린 장본인 이자, 너에게 허무하게 봉인당했던 흑정령이다."
흑정령의 말을 일레즈라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말도 안 돼! 카르디안은 인간이었어! 고대의 추앙받던 영웅이었다고!"
그는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려 애썼다.
“키기긱- 아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이건 몰랐겠지? 그년은 그저 내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을. 길거리에서 거지처럼 굶어 죽어가던 여자 하나를, 전설적인 존재로 추앙받게 만든 것이 나였다.”
이제, 일레즈라는 경멸 어린 표정으로 악을 썼다.
“거짓말!! 카르디안의 서에 그런 내용은 없었어!”
“일레즈라, 여전히 어리석네. 카르디안의 서는 단순한 마법서가 아니야.”
그는 낮고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아아. 그전에, 너희가 알고 있는 카르디안의 최후는 어떻지? 영웅답게 추앙받으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헛소리! 이 세계를 파멸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던 중, 뒤져버렸어!”
“그게무슨...”
“말 그대로 뒤져버렸지. 잠시 그년의 정신이 돌아왔을 때, 제멋대로 죽어버렸어. 망할 년.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내 의식을 카르디안의 서로 옮길 수 있었지. 젠장. 더러운 기억이 떠올랐네.”
카르디안은 옆에 있던 검은 모험가 한 명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피도 비명도 없었다. 단지, 어둠 속에서 먼지가 흩날리듯 사라졌을 뿐.
“일레즈라. 너도 마찬가지다. 배신자 일레즈라. 넌 이 모든 게 너의 자각으로 시작된 것 같나? 천만에! 시스템 오류? 하! 그래. 그게 잘 짜여진 코드 속에서 가능한 일 같나? 그 오류도 내가 만든 거야. 내가 널 일깨워 줬다고. 내가!!”
일레즈라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차가운 한기가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런데 네가 날 봉인해? 이 썩은 지하실에? 악취 나는, 숨 막히는 구석에 말이야! 감히 나를!!"
순간 검은 기운이 아지트 내부를 휩쓸었다. 일레즈라와 조르다인은 마력을 끌어올려 가까스로 막았지만, 덕분에 내부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후.. 그래. 후으. 그 녀석도 있었지. 이 녀석 말이야."
카르디안은 들고 있던 칼의 옆면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 녀석에겐 감사하고 있어. 이놈이 이 아지트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부활할 수 없었겠지. 너희 모두를 죽여 없애더라도, 그 녀석은 살려줄 생각이야.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키키킥-"
조르다인이 자세를 가다듬고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좋아. 네가 원하는 건 무명의 왕관이겠군."
"뭐... 그렇지. 너희가 죽어준다면 더더욱 좋겠군."
카르디안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조르다인과 일레즈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툭-
그러다, 일레즈라는 등에 벽면의 책장이 닿는 게 느껴졌다.
"조르다인."
일레즈라가 조르다인의 망토 끝자락을 꽉 쥐었다. 그는 힐끔 책장을 한번 돌아봤다.
"그래. 카르디안. 만나서 반가웠다."
조르다인은 책장에 살짝 나와 있던 '오라클' 이라는 책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무언가 툭 하며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함을 감지한 카르디안이 소리쳤다.
"잡아!!"
그 소리에 검은 모험가들이 달려들었지만, 조르다인과 일레즈라는 새하얀 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젠장!!"
쿠구궁-
그와 동시에 아지트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카르디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르다인!!!!!"
그의 절규는 무너지는 아지트 사이로 묻혀버렸다.
어두운, 허름한 방 안, 조르다인이 탁자를 세차게 내려쳤다. 묵직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의 맞은편, 일레즈라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움츠러져 있었다.
“내가 말했지. 재앙이 될 거라고. 저 꼴 좀 봐. 안 그래도 강한 모험가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거 보라고. 너랑 날 잡겠다고 NPC들을 학살하고 다녀! 저 꼴을 좀 보라고!”
그가 소리치자 일레즈라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아지트에 묻혀 사라졌다고 믿었던 카르디안과 검은 모험가 무리는, 기어코 살아 돌아왔다. 그들은 무명의 왕관을 찾기 위해 이 세계를 뒤집어엎고 있었다. 심지어 일반적인 모험가들조차 자취를 감췄다. 카르디안이 뭔가 수를 쓴 게 분명했다.
“...미안해. 나도 이렇게까지 꼬일 줄은 몰랐어..”
“후.. 어쩐지 일이 너무 순조롭더라. 네가 모험가 놈이랑 붙어 다니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진 안 됐을 거야.”
“알아.. 미안하다잖아..”
조르다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츠러든 그녀의 모습에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일레즈라는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내가 책임질게.”
“어떻게? 다음 점검 시간까진 아직 하루쯤 남았고, 점검이 시작돼도 우린 이 집에서조차 탈출하지 못할 수도 있어.”
일레즈라는 조용히 결심한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방법이 있어. 무명의 왕관으로 해결하면 돼.”
“너 정말..!! 그걸 지금 쓰면, 그와의 약속은? 게다가, 그 불안정한 아이템을 여러 번 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계속 이 세계에 남으려고?!”
조르다인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의 분노와 함께 매서운 마력의 파동이 방안을 휘감았다. 일레즈라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조르다인은 감정을 억누르려 애써야만 했다.
“후우...”
“괜찮아. 만약, 잘못되더라도... 지금 이 사태를 막는 게 더 중요해. 미안해, 조르다인.”
말을 마친 일레즈라는 망설임 없이 후드를 눌러쓰고, 무명의 왕관을 집어 들었다.
“일레즈-!”
조르다인이 허공에 내민 손은, 그녀의 옷깃조차 닿지 못했다. 일레즈라는 보라색 빛무리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일레즈라가 도착한 곳은 검은 태양이 하늘을 뒤덮은 대지 위였다. 흑정령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로, 이 세계는 하루 종일 검은 빛에 잠겨, 마치 곧 멸망할 듯 암울함이 가득했다.
“넌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나 봐?”
일레즈라는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바라봤다. 그곳엔 검은 모험가들 사이에서, 후으의 형상을 한 흑정령, 카르디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키킥- 마음에 안 들어? 이상하네. 우린 항상 이런 곳에서 살아왔거든? 키키킥-”
카르디안의 비웃는 말에 맞춰, 주변의 검은 모험가들이 기괴한 웃음을 토해냈다.
-끼기기긱.
-키킼킥킥
-크헤헤헥
“네가 그토록 아끼던 후으도, 널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조르다인도 없이, 혼자서 뭘 할 수 있지?”
일레즈라는 조용히 하얀 지팡이를 땅에 내리쳤다.
탁-
“원래 난 혼자였어.”
그 순간, 수많은 마법진이 어지러이 바닥을 수놓았다. 진한 보랏빛 마력이 일렁이며 응축되더니, 성벽 위로 폭발하듯 쏟아졌다.
검은 모험가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무너지는 성벽에 휩쓸렸다.
-끼에에엑
그러나 카르디안은 그 마력을 맨손으로 가볍게 쳐냈다.
쾅-!!
“끝이야? 이게 다야? 시시하네. 널 잡기 위해 내가 얼마나 준비했는지 알기나 해?”
무너진 성벽 너머로 수많은 검은 모험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족히 천명은 되어 보였다.
으득-
일레즈라가 이를 악물었다. 예상보다 숫자가 많았다. 처음엔 자신의 힘만으로 끝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후드 안쪽에 숨겨둔 무명의 왕관을 손에 쥐었다.
그때, 바람을 가르며 한 인영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검을든 조르다인 이었다.
“너..! 뭘 어쩌려고 그래!”
“늘 다 아는 척 잘난 체하더니, 이 정도도 예상 못 했어?”
그는 곁눈질로 일레즈라를 한번 훑어본 뒤, 검을 힘껏 내지르며 소리쳤다.
“전군!! 진격하라!!”
쿠웅- 쿠웅- 쿠웅-
뿌우우-
둥- 둥- 둥- 둥-
와아아아아!!
울려 퍼지는 북소리, 뿔피리의 경고음, 군사들의 함성과 일사 정연한 진군 소리가, 장엄하게 대지를 가득 메웠다.
“허.. 아직 많이도 남아 있었군.”
카르디안이 혀를 차며 위를 올려다봤다. 언덕 위로 수많은 깃발을 앞세운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페온
다르무드 기사단
세렌디아
그림자 기사단
엘리언
신성 기사단
발렌시아
발렌시아 왕국군
“너... 언제 이런 준비를...”
조르다인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사고는 네가 치고, 수습은 늘 내가 도맡아 왔잖아. 이 정도는 기본이지. 원래는 네가 현실로 넘어간 뒤 벌어질 혹시 모를 혼란을 대비한 거지만 말이야.”
“...그럼 넌..”
“그래. 이 세계에 남을 생각이었어. 너랑은 다르게, 난 이 새장 속이 편하더라고.”
일레즈라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조르다인은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가다듬었다.
“자, 일단은 수습부터. 카르디안의 목적은 무명의 왕관이다. 넌 뒤로 빠져. 전열 뒤쪽에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야.”
“누구?”
조르다인은 전방을 향해 몸을 날리며 외쳤다.
“시간이 없어! 가보면 알아!”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일레즈라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전열 뒤로 향했다.
채 앵-!
조르다인의 검이 카르디안이 휘두른 검과 맞부딪혔다. 그도 몸을 날려 조르다인을 막아선 것이다.
“어이, 정신 못 차리는 흑정령. 오늘 끝을 보자.”
“아니, 아니지. 정신을 차린 흑정령 이겠지.”
카르디안이 손에 힘을 주자, 맞물린 검날이 불쾌한 금속음을 냈다.
조르다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넌 아마 질 거야.”
“과연 그럴까?”
조르다인은 순간 검에 가하던 힘을 풀며 카르디안의 균형을 무너뜨렸고,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돌려 발차기를 날렸다.
퍽!!
“크윽..”
카르디안은 서너 걸음 뒤로 밀려났다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조르다인은 다시 검을 겨누며 말했다.
“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지우며, 조르다인은 다시 한번 카르디안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편, 전열의 끝.
일레즈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이 누군지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 하고 두드렸다.
“누구...?”
돌아보니 그곳엔,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 같이, 초라한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을 가진 그는 말없이 자기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 눈을 올려다보자,
-일레즈라 나야. 소안.-
말풍선이 떠 있었다.
-후으..?-
일레즈라 머리 위에도 말풍선이 떴다.
-지금은 소안 이라고 불러줘. 후으 캐릭터는 접속이 안 되더라고.-
-그렇구나.. 소안이었구나..-
일레즈라는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마력을 무리하게 끌어 쓴 탓도 있었지만, 소안을 눈앞에서 마주하니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이었다.
-괜찮아?-
소안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를 바라보며, 일레즈라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미안해 소안.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었어.-
-알아. 조르다인이 말해줬어. 어떻게 보면... 그걸 알아채지 못한 건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소안..-
일레즈라는 소안을 끌어안았다. 게임 속에선 불가능한 일일 텐데, 이상하게도 그의 따뜻한 손길이 등 뒤에서 전해지는 듯했다.
-일레즈라. 조르다인이 그러더라. 저 모험가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자기가 감당 못 할 수도 있다고. 그럴 땐, 점검 시간에 맞춰서 이 세계를 떠나야 할 거래.-
-...뭐라고?-
-그리고 말했어. 넌 분명 또 멋대로 움직일 테니까, 내게 널 붙잡아 달래. 그건 나만이 할 수 있다고 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래도 가봐야...-
일레즈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소안이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를 믿어보자.-
소안의 말에, 일레즈라는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바라보았다. NPC 연합군과 검은모험가들 사이에서 전투는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괴물 같은 힘을 지닌 검은 모험가들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연합군은 오른팔이 베여 나가면 왼팔로 검을 들었고, 다리가 잘려가면 기어서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처절한 갈망에 못이겨 하나 둘, 연기로 화하는 검은 모험가들을 보며, 연합군은 애써 피어오르는 공포를 억눌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레즈라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걸 느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검은 모험가들은 이제 오십여 명, 연합군은 대략 오천 명이 채 되지 않아 보였다.
두 병력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주시하던 그때.
"끄아아악!!!"
절규가 허공을 찢고 울려 퍼졌다.
일레즈라와 소안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전장 한복판에서 조르다인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쓰러진 그의 오른쪽 가슴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깊고 길게 그어진 상처에서 연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조르다인!!!"
그가 쓰러지는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는 카르디안. 그의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한 검은 기운은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정적이 전장을 덮었다. 연합군은 마른침을 삼켰고, 검은 모험가들은 기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쳐라.”
카르디안의 명령에 검은 모험가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크캬캬캬캭-
키에에엑-!
공포의 전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연합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를 향해 내달렸다. 도망치기 시작한 그들 사이로, 검은모험가들이 들이닥쳤다. 검은 늑대 떼가 양 떼를 덮치듯, 무차별한 도륙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얼굴을 땅에 파묻은 채 절규했고, 누군가는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늑대 떼가 양 떼를 집어삼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온몸이 피로 물든 검은 모험가들이 하나둘 카르디안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카르디안은 쓰러진 조르다인을 무자비하게 들어 올렸다.
"오오... 일레즈라. 이제 어쩔셈 이지? 남은 건 저 초라한 모험가 한 명뿐이로군."
일레즈라가 이를 악물었다.
"...조르다인을 놔줘."
카르디안은 높고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키히히힉. 그래, 놔주지."
그는 조르다인을 자신의 앞으로 내던졌다.
"이 개자식...!"
카르디안은 엎어진 조르다인의 발목을 지그시 밟았다.
"일레즈라. 오, 일레즈라. 내가 말했던가?"
그가 발에 힘을 주자, 조르다인의 비명이 고요한 전장에 울려 퍼졌다.
"크아악...!"
"내가, 그 왕관을 원한다고."
카르디안은 그렇게 말하며, 조르다인의 머리 위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상상해 봐, 일레즈라. 이 자가 죽고 나면, 과연 다시 태어날까? 아니면... 그걸로 끝일까?"
그가 조르다인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린 순간,
일레즈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소안,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지금까지 고마웠어."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카르디안을 바라보다, 품에서 금빛 왕관을 꺼내 들었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모두 내 책임이야.“
그 왕관을 본 카르디안은 눈을 부릅떴다.
“무명의 왕관!! 이리 내!! 키아악-!!”
그가 일레즈라에게 몸을 날리려는 그 순간, 조르다인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쿨럭.. 그렇게는.. 안돼...”
카르디안은 망설임 없이 조르다인의 오른쪽 손목을 베어버렸다. 피를 흩뿌리며 고개를 돌린 그의 눈앞엔, 왕관을 쓴 일레즈라가 하늘로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일레즈라!!”
카르디안의 절규섞인 외침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왕관을쓴 그녀의 눈앞에,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가 펼쳐졌다. 이해 할수 없는 세계가 그녀의 머릿속으로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진실의 너머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왕관을 빼앗아!”
카르디안의 손짓에 따라, 검은 모험가들이 신형을 날렸다. 수십 명의 위협적인 기척이 일레즈라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파앙-!
일레즈라가 허공에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검은 모험가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이내 그들의 몸은 검은 연기로 흩어져 사라졌다.
“키기긱..!! 일레즈라.. 네년이 기어코...!”
이번엔 격분한 카르디안이 다시 달려들려 했지만, 순간 일레즈라가 사라졌다. 그녀의 인기척이 다시 느껴진 곳은, 그의 등 뒤에서였다. 그 짧은 순간, 일레즈라는 어느새 카르디안의 등 뒤에서 조르다인의 잘려 나간 팔과 그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조르다인. 그동안 고마웠어. 조금 아플 수도 있어.”
그녀의 손이 상처에 닿자, 벌어진 피부가 빠르게 아물고 생기를 되찾았다.
“크으윽.. 일레즈라 너..”
“잠시 쉬고 있어.”
그녀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자, 조르다인은 평온한 얼굴로 잠에 들었다.
“대체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카르디안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일레즈라는 다가가 그에게 속삭였다.
“시끄러워.”
“무슨..읍읍..!”
그의 입이 사라졌다. 당황한 카르디안이 그녀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일레즈라는 간단한 동작으로 모두 막아냈다.
“네가 내 흑정령이자, 고대의 영웅을 조종한 카르디안이란 거지?”
카르디안은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읍읍읍!!”
“그래.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녀의 지팡이에서 새하얀 기운이 피어올랐다. 카르디안은 위협을 느끼고, 소안에게 달려들었다.
“읍읍..! 읍읍읍!!”
그는 소안의 목에 칼을 겨누며, 무언가를 급하게 전달하려 했다.
“그 칼 내려놔.”
지팡이 끝에서 하얗던 기운이 사그라들자, 카르디안의 눈치 미친 듯 반달처럼 휘어졌다. 그는 소안의 단검을 빼앗아 자기 입이 있던 자리를 찢었다. 피가 뚝뚝 흐르고, 그의 입은 기괴하게 너덜거렸다.
“일레즈라..일레즈라. 일레즈라! 일레즈라아!!!”
광기 어린 외침에도 불구하고, 일레즈라의 표정은 고요했다.
“칼 내려놔. 그럼, 고통 없이 보내줄게.”
“하핫. 고통이라... 그게 뭔데? 이런 걸 말하는 건가?”
그는 소안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카르디안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단검을 비틀었다. 하지만, 소안의 몸이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카르디안!!”
일레즈라가 격분했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카르디안은 히죽이며 그녀를 향해 외쳤다.
“자! 이제, 누가 더 고통스러울까? 입이 찢어진 나? 아니면, 소중한 사람을 잃은 너?”
그 순간, 누군가 카르디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카르디안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소안이 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너.. 어떻게..”
하지만 카르디안은 뒷말을 뱉지 못했다. 소안이 주먹으로 그의 찢어진 입가를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어후.. 내 손이 더 아프다. 너 때문에 블랙펄만 날렸잖아!-
주먹을 좌우로 흔들며 소안은 힐끗 일레즈라를 바라봤다.
-일레즈라. 네가 마무리해줘.-
소안의 말풍선을 보며, 일레즈라가 작게 얘기했다. 그러자 그녀의 말들이 머리 위로 떠오르며 말풍선을 이뤘다.
“저래 보여도, 저건 네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어. 저 녀석이 사라지면, 넌 다시는 원래의 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 몰라...”
-상관없어.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어서 끝내버려.-
카르디안은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분한 듯 그의 눈에서는 붉은 핏물마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키이익!! 너도, 나도... 똑같은 오류덩어리잖아! 이레귤러!!!”
일레즈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래. 우리 모두 오류야. 그러니까..”
그녀는 잠시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낭자한 핏물 사이로 잠들어 있는 조르다인과, 소안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너도, 나도, 이 세계도.”
그녀의 지팡이로 다시 한번 새하얀 기운이 모였다. 카르디안은 쓰러진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이익.. 그래. 인정하지. gkwlaks dlrp Rmxdlfkrh todrkrgkwl akfk. sj Ehgks skdml dlfqndlsl..”
무언가 왜곡된 말을 내뱉은 그는, 이내 일레즈라의 마지막 일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끼에엑!!!”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지나가고, 검은 태양의 빛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잘했어, 일레즈라!-
소 안이 다가왔지만,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오류 난 이미지처럼 불안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안..”
그녀가 말하자,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올랐다.
-그래. 다 끝났어. 일레즈라.-
“응. 그리고 나도.. 곧..”
-무슨 소리야?!-
소안이 당황한 사이,
“일레즈라!”
조르다인이 달려왔다. 일레즈라의 힘이 약해지자,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조르다인.. 나는 곧 사라질거야..”
“그래. 하지만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조르다인의 눈물이 일레즈라의 뺨을 적셨다.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다.
“항상 내 뒤치다꺼리 하느라 고생했어.”
그녀의 하얀 손이 조르다인의 눈가를 향하다, 힘없이 떨어져 버렸다.
-뭐야. 조르다인, 어떻게 된 거야?-
소안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조르다인에게 물었다.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무슨 방법? 일레즈라는? 어떻게 되고 있는거야!!-
조르다인은 일레즈라를 안아들었다.
-곧 점검 시간이야. 그때를 노리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가 마력을 개방하자, 그 앞에 공간이 찢기듯 열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소안의 말에 조르다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안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조르다인도 그의 뒤를 따르며, 찢긴 공간은 곧 닫혔다.
-여긴 어디야?-
-호궁 이라고 한다. 전에 말했던 이벤트로 이어진, 이 세계의 끝자락이지. 현실과 가장 가까운.-
-아..-
조르다인은 이제 거의 반투명해진 일레즈라를 소안에게 조심스럽게 넘겼다.
“일레즈라. 잠시만 눈 좀 떠봐.”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
“조르다인.. 여긴..”
그는 일레즈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제 그곳에선 행복해야 해. 바쁘게도, 숨어서도 살지 말고. 알았어?”
“무슨 말이야...”
“내가 말했잖아. 뒷수습은 내 몫이라고.”
그는 일레즈라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겨냈다.
“안돼, 조르다인.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일레즈라. 너와 함께했던 시간이 정말 즐거웠어. 우린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약속할게.”
조르다인은 왕관을 썼고, 일레즈라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잠에 들었다.
-후으... 아니, 소안. 일레즈라를 잘 부탁해.-
곧, 점검이 시작되었다는 문구가 뜨고, 소안의 접속이 끊어졌다.
“이게... 대체...”
소안은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처음엔 조르다인의 말처럼, 단순한 이벤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맞이 절벽에서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이벤트도, 게임도 아니었다. 정말로 ‘일레즈라’ 라는 존재의 발버둥이었다.
순간 소안의 방안 조명이 꺼졌다. 암막 커튼으로 가리워진 탓에, 방안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찼다. 정전인가 싶어 커튼을 걷자, 쏟아지는 햇살이 바닥을 수놓은 하얀 머리칼을 비추었다.
곧 커튼을 모두 걷은 소안이 뒤를 돌았을 때, 그곳에는 일레즈라가 조용한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소안은 놀라서 소리쳤다.
“일레즈라!!”
하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은 눈 부신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Epilogue.
은은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어느 달동네 골목길.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계단 위,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손에는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는 휴대폰이 들려있었고, 화면에는 익숙한 풍경, 달맞이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기억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말이야.”
그의 말에, 옆자리에서 하얀 머리의 여자가 조용히 웃었다.
“응.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해. 어떻게 딱 거기 서 있었을까. 운명인 거지, 운명.”
현실의 옷을 입은 일레즈라는, 이제 조금 익숙해진 듯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달맞이 절벽의 절경 속, 그들 캐릭터와 같이 앉아 있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왕관을 쓴 조르다인 이었다.
그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바람은 그의 망토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한참 말이 없는 걸 보니, 둘이 또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나 보군.-
조르다인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올랐다. 순간 일레즈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야! 아니거든! 네가 뭘 알아!-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일레즈라를 바라보며 소안은 속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꼬리엔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웃지 마.”
정색하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소안은 게임 속에서 말풍선을 띄웠다.
-일레즈라가 웃지 말래.-
-야!!!!-
조르다인은 내심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 거짓말 같던 전투가 지나고, 한번 오류를 일으킨 무명의 왕관은 왜인지 더 이상 오류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검은 모험가들 중 그 전투에서 빠져 나간 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르다인은 왕관의 힘으로 그들을 붙잡으러 다니고 있었다.
-끝까지 뒷수습은 내 몫이군. 안 그래 일레즈라?-
그 말에 일레즈라는 조금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꿈만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항상 조르다인이 마음 한켠에 걸려있었다.
-...외롭진 않아?-
-외로울 틈이 없어. 그 검은 놈들이 날 못살게 굴거든. 게다가 너희들도 있으니까.-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조르다인 이라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앗, 다시 가봐야 할 것 같아. 나중에 보자. 일레즈라, 소안.-
그렇게 말하며 조르다인은 모습을 감췄다. 아직도 그는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인 모양이었다.
휴대폰에서 시선을 뗀 소안과 일레즈라는 달빛이 내려앉은 소담한 풍경을 바라봤다. 일레즈라는 달맞이 절벽과 묘하게 닮은 이곳을 좋아했다.
문득 일레즈라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네가 날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난 아마 이 아름다운 광경을, 이 황홀한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을 거야.”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넌 어때.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치며 살고 있진 않아?”
글을 마치며.
현실에서도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피처로 찾은 게임에서마저 경쟁에 내몰릴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쉼은 없을까?’ 검은사막 모바일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노래하는 NPC, 그리고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게임을 즐기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이 소설 속에 녹여내고 싶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행복해진 그녀의 질문에 무엇이 떠오르셨나요?
지나칠 수도 있는 이야기였는데, 당신은 멈춰 읽어주셨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