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렌디아 자치령
제1장 세렌디아 북부 채석장
우리 형님이 말씀이 돌 보기를 황금같이 하라고 했거든. 그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이거야. 목재 건물? 이제 한물갔지! 홍수라도 나면? 불이라도 나면? 또 썩기는 얼마나 잘 썩는데?
저 높다란 하이델 성벽을 보라고. 순백의 돌로 지어진 성은 또 어떻고? 껄껄, 바로 이 북부 채석장에서 나온 돌로 지어진 것들이지! 힘들게 곡괭이질을 하다가도 허리를 펴고 하이델을 보노라면 피로가 싹 가시거든!
우리 형님 말씀이 바로 그런 게 삶의 기쁨이라고 하셨지.
그런데... 그런데 이런 나에게 비극이 닥쳤네!
갑자기 어디선가 광산 임프들이 몰려왔지! 환장하겠는 건, 그들이 우리 채석 도구를 다 훔쳐 달아나더니 채석장을 점거해버렸지 뭔가!
그러더니 채석장을 제 것처럼 사용하고 있네. 돌을 쌓아 방어탑을 만드는 재주는 또 어디서 배워 온 건지, 원!
마차에 가득 실은 돌은 어디로 가져가려고 하는 걸까? 이제 채석장에는 일하는 인부들보다 광산 임프들을 더 많이 만나는 지경에 이르렀네.
우리 형님 말씀이 고난 뒤에는 행운이 찾아오기 마련이라는데, 이 고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어 두렵구만!
하이델에 요청했지만 파견된 병사들도 맥을 못 추고 있네. 이대로 채석장이 문을 닫으면 딸린 식솔들이 길거리로 내몰릴 걸세.
아, 엘리언이시여! 가여운 종을 굽어살피소서!
-잼카스 웜스베인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
제2장 황금 두꺼비 여관
으레 그렇듯 어느 지역에 가면 빼놓지 않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세렌디아 하이델에 위치한 황금 두꺼비 여관이 그랬다. 하이델에서 으뜸가는 여관이라고 손꼽히는 황금 두꺼비 여관은 분수대 광장 아랫길에 위치한 사거리에 있었다. 하이델 어느 곳을 가든 그 사거리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황금 두꺼비 여관은 자연스레 명소가 됐다.
여관 앞에는 이름에 맞춰서 두꺼비 모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두꺼비가 여관 주인인 보니 로렌에게 복을 점지해 주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심지어는 중요한 일 전에 두꺼비 모형을 쓰다듬으면 일이 잘 해결된다는 소문도 생겨났다. 두꺼비 모형 아래에 진짜 소원을 이뤄주는 황금 두꺼비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앞에서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게 어딨냐고 코웃음을 쳤지만, 종종 늦은 밤 몰래 여관 앞 두꺼비 모형을 쓰다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 명이 두 명이 되고, 곧 걷잡을 수 없이 소문이 불어나자 근래에는 출산을 앞둔 임산분, 출전을 앞둔 군인,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까지 새벽에 간절히 여관 앞에서 기도하는 여러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두꺼비를 쓰다듬는 시간이 새벽으로 굳어진 데에는 또 이유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하도 두꺼비 모형을 만지다 보니 종래에는 손 때로 반질반질해져 해 뜰 무렵이면 빛에 반사되어 정말 황금처럼 빛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렌디아가 칼페온과의 전쟁에서 항복 선언을 한 후, 계속 번창할 것 같던 황금 두꺼비 여관에 비극이 시작됐다. 어느덧 하이델 거리에 제 집마냥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는 칼페온 시안 상단이 나타나면서부터다. 지부장으로 파견된 이소벨 엔카로샤가 가장 먼저 노린 것은 황금 두꺼비 여관이었다.
이소벨은 상냥한 척 보니 로렌에게 접근해 무역으로 큰돈을 벌 일이 있다고 꼬드겼다. 시안 상단이라면 메디아 셴 상인회와 맺어주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라고 속삭였다. 심지어 부족한 돈은 시안 상단이 빌려주겠다고 했다. 일종의 투자라는 명목이었다. 보니 로렌이 무역으로 큰 성공을 하면 서로에게 좋을 것 아니냐는 논리였다.
마침 조르다인이 세렌디아를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보니 로렌에게 넌지시 말한 참이라 무역상으로도 성공하고, 시종장의 신임을 얻을 자신의 미래에 보니 로렌은 신이 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소액이었던 금액이 점차 집 한 채 단위로 불어났지만 보니 로렌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황금 두꺼비 여관은 여전히 장사가 잘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이자가 빌린 원금보다 두 세배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상냥했던 이소벨이 차갑고 냉소적인 모습으로 보니 로렌에게 빚 갚기를 독촉하기에 이르자 그제야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담보로 달아두었던 황금 두꺼비 여관이 시안 상단에 넘어가 버린 후였다. 여관을 인수하자 이소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여관의 상징인 두꺼비 모형을 뽑아버린 것이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사람들, 제대로 지불할 돈 없이 시간만 때우고 가는 손님들은 이소벨에겐 필요 없었다.
불행하게도 여관을 넘겨도 보니 로렌의 빚은 어마어마했다. 이소벨은 그런 보니 로렌이 도망가지 못하게, 그렇다고 어디론가 돈을 벌러 가지도 못하게 여관 한쪽에 앉혀두고 늘 핍박했다. 우울한 얼굴로 머리를 감싼 채 이소벨에게 구박받는 보니 로렌은 또 다른 황금 두꺼비 여관의 상징이 됐다.
제3장 시종장, 조르다인 듀카스
세렌디아의 수도 하이델에서는 시간이 되면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는 조르다인 듀카스가 재상직에 있을 때부터 칼페온과의 전쟁에서 패배 후 시종장으로 격하되었을 때도 계속 이어져 왔다.
조르다인 듀카스는 오후 4시가 되면 급한 업무를 다 끝내고 잠시 산책에 나섰는데 그 시간에 맞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를 보기 위해 길거리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넘쳐났던 탓이다.
조르다인 듀카스. 어린 시절부터 나라를 위해 군에 입대해 싸웠고, 커서는 세렌디아 안팎으로 재정과 외교를 책임지는 젊고 잘생긴 정치가의 등장에 세렌디아 사람들은 열광했다. 복잡한 정치 얘기에 관심 없는 사람도 조르다인 듀카스 이름은 다 알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거나 말거나 조르다인은 일정한 속도로 급한 기색 없이 천천히 하이델 거리를 누볐다. 언제나 마지막은 분수대 광장이었다. 그곳은 높다란 지대에 지어져 하이델 거리가 한눈에 보였다.
물론 그를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칼페온과의 전쟁에서 패배 후 아직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리하게 세금을 거둬들였기 때문이었다.
전쟁 수습을 하느라 형편이 안 되는 주민들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냐는 도몬가트 영주의 조심스러운 의견에도 불구하고, 조르다인은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건 칼페온도 마찬가지일 거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종장이 다시금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저녁에 가까워지면서 해가 저물며 노을이 조르다인의 머리칼에도 닿아 반짝였다. 잿빛이 섞인 금발 머리는 세렌디아 사람이라면 흔히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라서 특별해 보였다. 화가가 공들여 섬세하게 그어놓은 것 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대에 근처에서 조르다인을 훔쳐보던 소녀들이 한 번만 나란히 서서 얘기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속삭였다.
노을을 따라 뺨에 드리워진 그림자조차도, 사색에 잠긴 차가움이 서린 푸른빛 눈동자도 마치 "더 이상 접근하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붙은 조각상처럼 근사해 보였다.
조르다인은 자신을 흘긋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게 또 멋있어 보여서 자렛 도몬가트는 마음을 졸였다. 할 수만 있다면 [자렛 도몬가트]를 크게 적어 조르다인에게 이름표마냥 붙여놓고 싶을 정도였다.
자렛이 좀 더 철이 없을 나이고, 아직 공주 신분이었다면 분명 시도해봤을 것이다. 조르다인과 약혼까지 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자렛은 늘 그의 앞에서 작아졌다. 이런 고민을 오랜 친구, 글리시 마을 무역상이 라크에게 털어놨더니 그녀는 이런 조언을 해줬다.
"시종장께서 요즘 고대 유물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으시던데요. 고대인의 석실과 마법사의 제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지만 쉽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요즘 세렌디아 곳곳에서 괴물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식 때문에 곤란하시거든요. 고대인의 석실 근처에는 클리프 대장도 있으니, 그쪽으로 가셔서 시종장께 힘이 되어주시는 건 어떨까요?"
자렛 도몬가트는 떠올렸다. 일을 훌륭히 끝내고 돌아왔을 때 조르다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그때는 이렇게 뒤에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이델을 걷게 될지도 몰랐다. 행복한 상상이었다.
제4장 빼앗긴 린치 농장
마티어스가 벨리아의 무역 상인이 되기 전, 세렌디아 린치 농장에 관리인으로 있을 때 일이다.
농장 주인은 무라나 린치와 자라 린치로 둘은 부부 사이였다. 린치 가문은 본래 폭탄 제조로 유명했다. 하지만 전쟁에서나 쓰이는 폭탄으로 먹고살고 싶지 않다며 무라나 린치의 할아버지가 그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하이델 인근에 평야를 전부 사들인 후로부터는 린치 대농장으로도 유명해졌다.
마티어스가 기억하기로 무라나 린치는 늘 피곤해하는 사람이었다. 원체 체력이 약해 골골거리기 일쑤여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했고 농장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린치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만큼 폭탄 제조는 곧잘 해냈는데, 시험 삼아 만든 폭탄이 놀라운 성능을 보이면서 무라나 린치의 명성도 높아졌다.
반면 자라 린치는 농장 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몸이 쉬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자라 린치에게 게으름은 있을 수 없었다. 일 년 농사 계획이 정해지면 그녀는 반드시 그대로 움직였다. 물론 대농장의 작물을 길러낸다는 게 엘리언 신의 가호와 자연환경의 축복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변수에 맞게 대처하는 방법을 여든아홉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만큼 까다로운 고용주였지만 마티어스는 늘 자라 린치를 존경했다.
마티어스가 무역 상인이 되어 새벽녘에 일어나 물건을 점검하고 먼 길을 떠나기 전엔 반드시 정보를 먼저 탐색하고, 유행이 흘러가는 흐름을 파악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건 전부 자라 린치 덕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서 린치 부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수군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자라 린치가 드세서 무라나가 기를 못 펴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 말에 무라나는 속상해서 작업실에 처박혔고, 자라 린치는 기가 드센게 뭔지 보여주겠다며 그 말을 한 사람의 멱살을 잡았다. 마티어스는 옆에서 자라 린치를 말리는 척하면서 함께 그 사람을 발로 찼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마티어스가 보기에 자라 린치는 고작 농장 한 개에 묶여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라나 린치였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칼페온 북부 대농장처럼 세렌디아 북부 농장들을 통틀어 운영하는, 요즘 말로 전문 경영인도 될 수 있을 터였다. 마티어스는 그 말을 자라 린치에게 넌지시 건넸다가 허수아비에 거꾸로 묶일 뻔한 후로는 입도 벙긋 안 했다.
그 사건이 있고서 나흘 후 무라나는 작업실에서 나와 한밤중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늘 소심해 하던 모습과 달리 스스로가 나서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그것도 무자라서 왜 이러냐며 화를 내는 사람들을 잡아당겼다. 그렇게 해서 다 모이자 무라나는 잘 보라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때 폭죽이 터지며 색색의 불꽃들이 흐드러지게 밤하늘을 수놓았다.
얼핏 보기에 사람 얼굴을 그려놓은 듯했는데 다들 짐작으로 자라 린치겠거니 했을 정도였지만 그것을 본 당사자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그 후에 사람들은 자라 린치에게 함부로 말했던 것을 사과하고 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다며 구구절절 얘기한 후에야 자러 갈 수 있었다.
자라 린치는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어도 무라나 린치와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시간을 빼놓은 적이 없었다. 아마 무라나 린치가 새로운 폭탄을 시험하는데 밭이 필요하다고 하면, 마침 화전 농사를 해볼까 하던 참이었다고 맞장구쳐줄 사람이었다.
때문에 마티어스는 벨리아 무역 상인으로 일하는 도중, 린치 농장이 제단 임프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말에 덜컥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크루혼 웜스베인 교관님께. 소정의 지원금을 함께 동봉합니다.
자라 린치 부인은 분명 농장을 되찾으려고 할 것이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분이시니 부디 대피해야 한다고 가로막아 화를 당하지 마시고 든든한 지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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