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하우 전수 이벤트] 모험 일지 정리 3. 중립 국경 지대 2021-07-15 13:32 이히헷

3. 중립 국경 지대

 

제1장 감시탑의 비밀

중립 국경 지대에는 클리프가 칼페온과의 전쟁 때 끊어 놓은 다리가 놓여있다.

우뚝 솟은 감시탑에는 점령국에 따라 기사단이 주둔하곤 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인 지금은 칼페온 기사단이 감시탑을 지키고 있다. 자비에로 비텔로는 감시탑에서 맞닿아 있는 세렌디아 서남부 관문에 책임자로 있었다. 절친한 친구, 클리프가 발레노스로 좌천되자 중앙에 환멸이 나 변두리 지역으로 자원 왔다.

전쟁이 끝났으나 국경 지역은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런데 감시탑에서 칼페온 기사단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중립 지대에 서식하고 있던 오크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급기야는 감시탑을 넘어 자비에로가 있는 서남부 관문까지도 오크들이 나타났다.

말썽꾸러기 안온이 오크를 보고 사람인 줄 알고 다가갔다가 다칠 뻔한 후로는 경비 인원도 두 배로 늘렸다.

아무래도 칼페온에서 왔다는 기사단이 의심스러웠다. 칼페온에 기사단은 델페 기사단과 트리나 기사단 둘이었는데, 감시탑에 있는 기사단은 전혀 복식이 달랐다.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은 병사와 끊어진 다리까지 동행해 멀리서 감시탑 입구를 지키고 있는 자를 염탐했다. 병사는 그자를 보더니 긴가민가하며 그림자 기사단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림자 기사단?"

"칼페온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할 때 그림자 기사단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보통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하기 어려운 일들 있잖습니까."

떳떳하지 못한, 더러운 일들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은밀하게 움직이는 기사단이라고 하기엔 저자는 너무 보란 듯이 있는 것 같은 게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자비에로는 그림자 기사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착이 들었다.

그림자 기사와 자신의 거리가 상당함에도, 얼굴까지 가리는 투구에 복색마저 새카만 차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투구 안의 붉은 눈이 자비에로를 꿰뚫을 것처럼 정확히 바라봤다. 병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림자 기사단 명칭을 쓰는 데가 또 있습니다. 어둠의 군주 벨모른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어둠의 군주를 섬기는 자들도 그림자 기사단이라고 불렸습니다. 하긴, 그들은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만..."

병사는 말을 잇다가 얼굴을 찌푸리고 코를 틀어막았다.

"그런데 감시탑에서 계속 이상한 연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냄새가 무척 고약한 것 같습니다."



제2장 중립 지대의 오크들

정찰대원 델피노, 크리스, 카를, 알렉은 중립 국경 지대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요즘 오크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는 보고를 받은 터였다. 자칭 오크 전문가라고 우기는 버디 대장이 필시 무슨 수상한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며 정찰하러 다녀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브레디 요새에 진입하기 전, 근처 숲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늦은 밤이라서 하룻밤 야영을 할 참이었다.

"크리스, 바람이 좀 세게 부는 것 같은데. 비 올 것 같지 않냐?"

"오늘도 육포랑 감자죽이에요? 지겨워..."

"돌로 단단히 막아둬서 불은 안 꺼질 것 같은데. 연기가 너무 나면 곤란하니까."

"그릇 좀 줘, 카를. 이거라도 있는 걸 감사히 여겨. 풀뿌리 먹을 거 아니면."

"킁킁, 그런데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어디서 나는 냄새지?"

서로 제 할 말만 툭툭 내뱉는 것처럼 중구난방이었는데도 오랫동안 함께 지내서 그런지 묘하게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충 식사를 끝내자 다들 자리를 잡고 가진 장비들을 점검했다. 검이 잘 벼려졌는지 확인하고, 활시위가 너무 느슨하게 메이진 않았는지 손질했다. 그렇게 서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을 때 알렉이 슬쩍 챙겨뒀던 오클렐레를 꺼내 들었다. 모두가 기겁했다.

"야! 지금 우리가 놀러 온 줄 알아?"

"어허, 나도 그렇게 생각 없는 놈 아니라고. 음악은 내 영혼의 단짝인 걸 어떡해? 한순간도 빼놓을 수 없지."

"설마 정말 연주할 건 아니시죠?"

알렉은 줄곧 악단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음악에 전념하기엔 먹고살기에 바빴고 무엇보다 악기는 너무 비샀다. 그가 들고 온 우클렐레도, 두고 온 기타도 남의 것을 눈대중으로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알렉은 돈을 벌기 위해 자원입대를 했다.

"다 방법이 있지."

알렉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 윙크를 하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소곤거리는 말소리처럼 아주 조심스러운 연주였다. 그러자 오히려 알렉에게 뭐라고 하던 나머지 세 사람이 곤란해졌다. 당장에라도 흥얼거리고 싶을 만큼 좋은 선율이었기 때문이었다. 델피노가 맥빠지게 웃으며 말했다.

"버디 대장님이 있었으면 그 우클렐레는 연주가 아니라 우리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을 거야."

동그랗게 앉아있는 네 사람, 타닥이는 모닥불, 그리고 그 주변을 감도는 우클렐레 연주 소리에 맞춰 알렉의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포근하게 감쌌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일렁임이 네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크리스, 또 부모님 생각하면서 우는 거 아니지?"

"아, 안 울어!"

"델피노, 동생은 좀 어떻대?"

"많이 나아졌대. 이제 가끔 일어나서 걷기도 하나 봐. 카를은 이번 일 끝나면 모험을 떠난다며?"

"흐흐, 네. 메디아부터 가보려고 합니다."

"그래, 이제 내일이면 끝나는 걸 뭐. 다들 마음 편하게 가져. 오크가 이상하단 소문도 버섯을 너무 많이 먹고 탈 나서 그런 거 아닐까?"

알렉이 연주의 마지막 음을 말끔하게 끝내며 대답했다.

"맞아, 별일 아닐 거야."

-

그랬었는데.

카를은 최대한 아래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거기에는 크리스가 이상한 자세로 몸이 꺾인 채 누워있었다. 컥, 컥 소리를 내던 것도 완전히 멈췄다.

카를은 후들거리는 자세를 바로잡으려 애섰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오크가 성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붉은 눈에,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무기를 쥐었고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누렇고 커다란 이빨 틈으로 침이 줄줄 샜다. 날이 밝자마자 브레디 요새로 진입했는데 거기에는 올 것을 알았다는 듯이 오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리듯 가지런히 서 있는 모습은 과호흡이 올 정도로 무서운 장면이었다. 공격은 한순간이었다.

분명 버디 대장에게 듣기로는 오크는 자신이 무기를 들었다는 것도 까먹어서 주먹을 먼저 내지르기 일쑤고 일생의 목표는 버섯을 먹는 것일 정도니 오크 앞에서 기죽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었는데. 카를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오크가 성큼 다가왔다. 그러다가 등에 뭔가 딱딱한 게 걸렸다. 막다른 곳이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오크의 무기가 하늘 위로 높게 솟구쳤다. 카를은 눈을 감았다.

"카를! 도망쳐!"

저편 위쪽에서 알렉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니 알렉이 쏜 화살에 맞은 오크가 성난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정확히 목을 노렸는데 치명상은커녕 오크의 화만 돋운 듯했다. 하지만 덕택에 카를에게 향했던 오크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카를은 굳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알레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알렉이 위에서 밧줄을 내렸다. 뒤쫓아온 오크에게 발이 붙잡히기 전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헉, 허억."

급한 숨이 카를의 입에서 두서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안도하긴 일렀다. 둘을 놓친 오크들이 깅르 찾기 위해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크들은 확실히 이상해졌다. 오크들이 공격성을 띤다는 소문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오크가 전부 중립 지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지키듯이 감시탑 주변을 감싼 채였다. 알렉이 카를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카를, 카를. 어딨어, 신호탄 어딨어?"

"크, 크리스가..."

"잘 들어. 어떻게든 이곳이 위험하다는 걸 알려야 해. 알았지? 야! 정신 차리라고!"

알렉이 카를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게 쳤다. 그러자 카를의 초점이 점차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부여잡고 눈을 마주 보며 알렉이 말했다.

"내가 오크들의 시선을 끌게. 넌 몰래 내려가서 신호탄을 쏴야 해. 알았어? 세렌디아에서 볼 수 있게 말이야."

"네, 네네!"

"넌 그냥 신호탄을 쏘면 돼. 쉽지? 그리고 돌아가서 버디 대장에게 말하는 거야, 감시탑에서 나오는 이상한 연기가 오크들을 조종하고 있다고. 감시탑에서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다고 말이야. 넌 우리 중에서 제일 빠르잖아. 할 수 있어."

카를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가장 어린 녀석이었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모험을 떠날 거라며 신나하던 게 어제였다.

알렉은 카를을 일으켰다. 카를이 잠시 머뭇거렸다. 알렉은 그가 하고 싶은 질문이 뭔지 알 것 같아 슬프게 웃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알렉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카를이 비척거리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오크들이 거친 발걸음으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카를이 신호탄을 쏠 때까지, 그리고 그가 안전하게 멀리 도망갈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이목을 끌어야 했다.

화살은 이미 다 써버린 후였고 칼은 오크가 휘두른 주먹에 부서진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나무를 깎아 겨우 모양만 흉내 낸 오클렐레 뿐이었다. 알렉은 악기를 집어 들며 심호흡을 했다. 마지막 연주를 할 차례였다.

-

중립지대에서 붉은색 신호탄이 쏘아졌다. 그것은 전쟁 혹은 그만큼 준하는 위급 상항을 뜻했다. 버디가 정찰 대원들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브레디 요새에서 오크와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오크들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군사 피해가 커져가자 세렌디아에서는 오크가 굳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는다면 전투에 응하지 말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그 후 오크 캠프로 버디라는 자가 찾아왔다. 본래 세렌디아 어느 부대의 대장이었던 자였지만 오크와의 전투 이후 돌연 직책을 마다한 채 홀로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돌아오지 못한 자신의 동료들과 그들이 발견했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제3장 델페 기사단과 하피

중립 지대와 칼페온 북부의 그 경계 미묘한 사이에는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는 델페 기사단 성이 있다. 델페 기사단은 칼페온이 왕정이었을 시절 왕의 직속 호위군으로 가이 세릭 왕의 이름을 따 세릭 기사단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언제나 전쟁 최전방에 나서서 왕을 위해 싸우던 기사단은 30년간 치른 발렌시아와의 전쟁이 패배로 돌아가고 그 틈을 타 귀족들 주도로 공화정이 세워지면서 존속에 대해 위협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 그들을 이끌어 준 것은 엘리언교 수도원장 레하드 성인이었다. 그는 지휘권을 잃은 델페 기사단을 엘리언 교단에 편입시켜 신성 기사단으로 탈바꿈했다. 물론 교단은 사사로이 재산이나 군대를 가지고 있을 순 없기 때문에 엘리언의 어린 종들을 보호하고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라는 명복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교단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은 델페 기사단의 대부분을 칼페온의 최대 곡창 지대인 북부 대농장을 수호하고 칼페온으로 밀입국하는 자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국경 지대로 보냈다.

그렇게 마련된 델페 기사단 성 근처에는 예전부터 하피들이 살았는데 그들의 우두머리는 대대로 카란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피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암컷만이 될 수 있다는 카란다는 보통 집권 기간이 10년 정도라고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카란다가 교체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전 카란다의 집권 기간이 채 5년도 안 됐을 때 일이었다. 규칙이 깨졌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했다.

그때부터 하피들은 돌연 델페 기사단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능선을 따라 높은 지대에 지어진 델페 기사단 성은 시야가 넓어 밑에서 오는 적들을 막기에는 좋았지만 이처럼 비행하는 적들을 막기에는 부적합했다. 기사단은 속수무책이었고 세렌디아에서 칼페온으로 가기 위해선 델페 기사단 성을 지나가는 방법밖에 없었으므로 사람도 물자도 오고 가지 못했다.

하피는 원래도 지능이 뛰어난 종족이었지만 최근 그들의 공격 형태를 보면 어딘가 잘 훈련된 군대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한다. 마치 병법을 잘 아는 자에게 지시를 받은 듯한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델페 기사단 내에서는 새로 집권한 카란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지만 그들 중 몇몇은 보았다고 한다.

하피를 대동하고 나타난 의문의 사내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서늘한 경고가 섞인 말과 함게 브레고 윌리어 군단장을 위협하는 모습을.

 

제4장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회의실에는 적막 만이 감돌았다. 회의실에 길게 놓여진 책상 양 끝에는 마가렛과 엘그리핀이 앉아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델페 기사단 성에서 가장 사이 안 좋기로 손꼽히는 인물들이었다. 물론 엘그리핀의 일방적인 마가렛을 향한 악감정에 가깝긴 했다. 마가렛은 늘 자신의 의견을 반대하며 핏대를 세우는 엘그리핀에게 엘리언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며 차분히 설교했고, 엘그리핀은 그런 마가렛의 머리카락을 죄다 쥐어뜯어 놓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어쩌다 그 사이에서 앉아있는 제론은 안절부적하며 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왜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됐을까? 어쩐지 꿈에서 하피가 자기를 물어가 버리는 꿈을 꿨더랬다. 제론은 슬쩍 눈치를 보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쯤이면 충분히 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의자에서 엉덩이를 아주 살짝 들었다.

"앉아."

"넵!"

시선은 여전히 마가렛에 고정한 채 엘그리핀이 싸늘하게 말하자 제론은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회의실 탁자의 나무 무늬를 몽땅 셀 기세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곳에 회의가 소집된 이유는 쿠루토족에게 납치된 주민 구출 작전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마가렛과 엘그리핀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좁혀지지 않는 견해차로 인해 회의는 진척이 없었다.

마가렛은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쿠루토에게 무슨 사정이 생긴 게 분명하니 구조대를 보낸 후에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엘그리핀은 쿠루토 사정 따위야 어찌 됐든 먼저 공격한 곳은 그들이니 당장 토벌대를 보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그리핀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론 작전병. 누구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

그 순간 제론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샤이족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언이시여, 제가 그동안 예배를 많이 빼먹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 새벽 기도때 졸았다고 이러시는 거면 깊게 뉘우치고 앞으로 꼬박꼬박 헌금도 잘 낼게요. 제론이 한순간 다시없을 신실한 신자가 되어 쩔쩔매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브레고 윌리어 군단장이 들어왔다.

살 얼음장 같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엘리언 신이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에 감사해하며 제론은 존경이 담긴 눈빛으로 브레고 군단장을 바라보았다. 전쟁터다 보니 다듬지 못해 아무렇게나 기른 백금방이 마치 신이 보낸 사자처럼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결론은 어떻게 됐지?"

"토벌대를 보내야 합니다."

회의의 결과를 묻는 군단장의 말에 엘그리핀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마가렛은 익숙한 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화가 우선입니다. 그들도 엘리언의 종,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엘그리핀이 아주 지긋지긋하단 표정으로 마가렛을 바라봤다. 델페 기사단이 교단으로 소속이 옮겨지면서 저런 부류가 부쩍 늘어났다. 자신의 실력과 냉정한 판단이 아닌 신에 대한 기도와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

그게 도대체 전쟁터에서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전투가 일어나는 것도 신의 뜻, 살아남은 것도 신의 뜻, 부상을 당하거나 죽는 것도 신의 뜻이라면 모든 일은 개인의 노력의 여하에 상관없이 어차피 벌어질 일이란 뜻인가? 언젠가 한 번 실제로 마가렛에게 질문했을 때 그녀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답했다.

"엘리언 님은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뤄낸 결과물은 결국 엘리언 님의 떳떳한 자손이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던 엘그리핀은 군단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군단장님, 하피도 쿠루토도 심상치 않습니다. 저들은 이미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시기가 늦춰지면 인질들이 위험합니다."

"토벌대는 더 큰 분쟁을 일으킬 겁니다. 아니면 구조대를 보내어..."

"구조대? 잡혀간 인질들 중에는 전투가 불가능한 자들도 많다. 아무런 마찰 없이 구출한다고 하더라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나? 어차피 싸움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아직 그들이 왜 이런 행동을 벌였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전할 말이라던지 요구하는 게 있을 지도 모르는데 토벌대를 보낸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브레고 윌리어 군단장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엘그리핀은 잠시 격양된 숨을 골랐다가 차분히 말했다.

"먼저 공격한 것은 그들이니 우리가 그들의 사정을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브레고 윌리어 군단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회의가 드디어 결론이 났다. 군단장은 엘그리핀에게 토벌대 편성과 더불어 인질 구출을 최우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분간 델페 기사단 성을 공격하는 하피들은 마가렛이 담당하기로 했다. 마가렛은 엘그리핀에게 말했다.

"엘리언 님의 은총이 함께할 겁니다."

엘그리핀은 아무런 대답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더니 브레고 윌리어 군단장은 제론에게 말했다.

"활발한 토론은 전우애와 더불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마련이지. 마가렛이랑 엘그리핀 둘이 무척 잘 맞지 않나?"

도대체 어디가? 하마터면 까마득한 군단장에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뻔한 제론은 가까스로 웃어보였다. 뿌듯하게 웃는 브레고 윌리어 군단장을 보며 어쩌면 델페 기사단 성이 평안했던 이유는 브레고 윌리어 군단장의 무심함이 한몫했을 거라고 제론은 생각했다.

 

글자수제한으로 퀘스트 목록까지 따로 정리 -> https://blog.naver.com/pery13/222430279455

1205

이히헷

75189
  • 작성한 글367
  • 작성한 댓글2,420
  • 보낸 추천394
  • 받은 추천176
댓글 0
TOP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