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칼페온 북부 직할령
제1장 무너진 북부 대농장
선의와 친절함은 풍요로움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와닿는 곳이 있다. 바로 칼페온 북부 대농장이다. 칼페온 최대 곡창지대로 손꼽히는 이곳은 수확되는 작물량으로도 유명하지만 계절에 따라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땅이 워낙 비옥해 무얼 심든 잘 자라니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큰 걱정 없이 일 년을 보냈고, 치열하게 경쟁을 하지 않아도 부유했으므로 상인들 또한 견제 없이 서로를 도우며 살았다. 북부 대농장이 이렇게 평화롭고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토질도 한몫했겠지만 대농장의 주인, 노먼 레이트의 공이 컸다.
그녀는 칼페온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 레이트 가의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농장 일에 있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웃을 존중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가장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불편한 점은 없는지 언제나 세세하게 신경 썼고, 특히 대농장에 어린 식구가 늘어나는 것은 그녀의 소소한 기쁨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언제나 노먼 레이트를 존경했으며 한창 자라는 아이들에게 있어서도 삶의 교본이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민들 사이에서도 미묘하게 나쁜 관계가 생기기 마련인데 그 중심에는 잡화 상인 말릭이 있었다. 얼간이 말릭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사실 이름보다는 얼간이라고 더 많이 불려 몇몇은 그의 실제 이름이 얼간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남들보다 두 배는 큰 거인족으로 태어났지만 행동이 굼떴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공상하고 무언가 엉뚱한 것을 만들기를 좋아했다.
노먼 레이트는 말릭의 제조약 솜씨를 알아보고 일할 나이가 되자 상인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잡화 상점을 그에게 맡겼다.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으나 노먼 레이트의 결정이므로 함부로 토 달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문에 말릭을 향한 공공연한 시비가 늘어갔다.
물론 노먼 레이트가 없을 때만 교묘하게 괴롭혔으므로 말릭은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노먼 레이트에게 말하진 않았다. 말릭은 더이상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괴롭힘을 눈치 챈 장비 상인 라키아와 선물 상인 파세니아가 종종 괴롭히는 사람들을 꾸짖곤 했지만 그 둘 마저 등을 돌리게 된 사건이 있었다.
말릭은 자신을 믿어주고 아껴주는 노먼 레이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길 바랐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북부 농장지대 한 부분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와라곤 동굴이 드러났을 때 말릭은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와라곤들의 단단한 가죽과 무지막지한 입이 농사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때였으면 또 이상한 짓 한다고 혀를 차며 넘어갔을 사람들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부지가 무너지면서 많은 주민들이 동굴 안에 갇히거나 실종됐기 때문이었다.
구조대가 꾸려지고 칼페온에서 급하게 병사가 파견되는 사이 말릭이 기어코 와라곤 알을 대농장 안으로 가져오자 성난 주민들이 말릭을 내쫓기 위해 몰려들었다. 노먼 레이트가 말리지 않았다면 험한 일이 발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앙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구조를 돕지는 못할망정 와라곤 알을 가져온 말릭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릭과 북부 대농장 주민들의 갈등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제2장 샤이족 마을, 플로린
칼페온 북부에는 샤이족의 마을 플로린이 있다. 샤이족은 딱히 오가는 사람들을 제한한 적은 없지만 플로린은 어째선지 미지의 마을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외관적인 이유로는 푸르고 청명한 숲의 일부분과도 같은 플로린 마을이 주는 신비한 분위기 때문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어딜 가더라도 이렇게 많은 샤이족이 한데 모여있는 장면은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샤이족은 타 종족에 비해 몸집이 작고 왜소했는데 나이가 적든 많든 인간으로 따지면 9살~10살 난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실제로 샤이족은 괴롭힘을 많이 당하기도 해서 전부터 숲 깊숙한 곳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숨어 사는 데에도 한계가 오자 샤이족은 칼페온에서 이행한 타 종족 귀화 정책으로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하에 칼페온령으로 귀속됐다.
지금에야 어디를 가든 한 두 명 정도 샤이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외형만큼 그들이 마냥 귀엽다거나 어리숙하지는 않다. 그들은 한 번 정한 것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반드시 이뤄내고야 마는, 좋게 말하면 추진력을, 나쁘게 말하면 고집불통인 면이 있었으며 독립적이고 직설적인 성격 탓에 많은 이들과 함께해야 하는 일들을 금방 싫증냈다.
특히 타종족과 오래 어울려 산 샤이족이라면 그나마 낫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존댓말 발음이 안 되기 때문에 종종 오해를 사기도 일쑤였다. (이 경우에는 반대로 나이가 많은 샤이족임에도 불구하고 외관적으로 태가 나지 않는 탓에 다른 종족들이 무례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약초를 찾아내는 데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약초를 어떻게 적절히 활용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약효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샤이족의 특성 탓에 생겨난 속담도 여러가지다.
인간 사회에서 샤이족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격언은 "샤이족이 선뜻 베푸는 호의는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 그게 약초에 관련한 것이면 더더욱." 이었고
거인족 사이에서는 "작은 샤이족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가 있으며 수인족의 격언은 "우리의 좋은 친구 샤이족은 반드시 되갚아 준다."가 있다.
샤이족의 약초에 대한 실험은 종족을 가리지 않는다. 만약 플로린 마을로 여행갈 일이 있다면 샤이족이 값을 치르지 않고 선뜻 주는 것은 다섯 번쯤은 의심해야 한다.
제3장 브리나무 유적지에 감춰진
플로린 마을 근처에는 칼페온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브리나무 유적지가 있다. 그곳은 브리나무 숲과 동굴로 연결된 거대한 유적지인데 놀랍게도 브리나무에 있는 일부 유적들은 마치 고대 병기처럼 움직인다고 한다. 그들은 한창 발굴 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동굴을 지키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파수꾼이라고 불린다.
평소에는 정말 유적처럼 멈춰 서 있다가도 침입자를 발견하게 되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현재 이곳을 연구하고자 했던 고고학자들은 파수꾼들 때문에 조사가 어려워 거의 철수했지만, 최근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고고학자 마르타 키옌이 상주하며 연구 중이다.
다만 그런 마르타 키옌도 아직까진 브리나무 동굴로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칼페온군이 엄중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발견된 것이 무엇인지조차 바깥으로 전해진 바가 없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브리나무 동굴과 카프라스 동굴은 원래 하나로 이어진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지진이 나더니 두 동굴이 분리되었다. 그 이유로는 지금 카프라스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흑정령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어떠한 힘으로 생겨난 흑정령들이 브리나무 아래 숨겨진 유물의 힘을 탐하고자 했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 동굴이 분리됐다는 이야기다. 유물을 수호하는 힘이 얼마나 견고한지 악명 높은 유명한 연금술사 카프라스가 브리나무 유물을 노렸으나 실패했을 정도라고 한다.
제4장 대도시 칼페온
칼페온은 빛의 신 엘리언을 섬기는 유일교 국가다. 엘리언교 창시는 왕국이 생성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시자라던지 정확한 유래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글자가 만들어지면서 가르침이 적힌 교리서가 전해져 오고 있다. 교리서에 따르면 아래를 굽어살피던 엘리언 신이 자신의 힘이 담긴 검은 돌을 보내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검은 돌의 힘은 몹시 강력해서 고대인들은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냈지만 불가사의한 일로 인해 멸망했다고 기록된다.
엘리언교에서는 멸망의 이유를 신이 주신 힘을 가지고 감히 신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입문서에 맨 첫 장을 장식하는 문구는 이렇게 시작한다. "늘 겸손하고, 검소하게 지내야 한다."
애초에 교리서에 적혀있던 검은 돌 부분은 신의 숨결 내지는 은총이었으나 대륙을 휩쓴 전염병을 연구하던 도중 검은 돌에 대한 놀라운 능력이 발견되면서 어느새 교리서의 내용도 은근슬쩍 수정되었다. 엘리언 교를 믿는 대다수의 칼페온 국민들은 교리서보다는 주교나 사제가 설파하는 것을 듣기 때문에 어느 순간 변경된 부분을 눈치채기란 어려웠다. 모두가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엘리언교는 발렌시아가 당연한 것처럼 가지고 있는 신의 증표인 검은 돌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언 신이 칼페온을 위해 내린 선물이 발렌시아가 강탈한 것처럼 꾸며졌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신의 선물인 검은 돌이 왜 칼페온에서 멀리 떨어진 발렌시아 대사막에 떨어졌을 것이며 정작 엘리언을 섬기는 칼페온에서는 검은 돌이 한 톨도 나오지 않는지 의심해 볼 법했지만 그런 것들은 교묘하게 가려졌다.
검은 죽음이라고 불리우는 전염병이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귀족들은 그런 분노를 돌릴 곳이 필요했다. 엘리언교의 주장은 아주 좋은 빌미거리였다. 젊은 왕, 가이 세릭을 필두로 그렇게 기나긴 발렌시아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30년 간의 전쟁은 모래 폭풍으로 인한 자연의 위대함만을 깨달은 채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칼페온의 손해가 무척 컸던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 긴 전쟁이 끝나자 칼페온은 더욱 검은 돌에 안달냈다. 엘리언교도,
귀족들도, 왕도 전쟁을 하면서 보았던 검은 돌의 엄청난 힘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주변국들을 대상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욕심이 이유였다. 칼페온과 가장 인접해 있던 케플란이 첫 희생양이었다. 채광으로 유명했던 케플란은 칼페온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성문을 열어 항복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세렌디아는 만만치 않았다. 그곳엔 대장군 클리프가 있었다. 칼페온에 비해 훨씬 적은 병력이었지만 클리프의 전략으로 세렌디아는 늘 우위를 점했다. 그러자 칼페온은 수를 썼다. 일부 병력을 몰래 하이델 성으로 돌려 기습 후 혼란을 틈타 도몬가트 왕을 납치했다. 칼페온은 세렌디아 왕을 볼모로 잡고 조약서를 내밀었다.
칼페온은 그렇게 다른 나라의 흑결정을 긁어모았다. 그들이 이룬 성대한 부와 권력은 이렇듯 추한 욕심과 전쟁으로 점철되었으나 역사의 기록은 승자에게 후한 법이므로 칼페온의 화려한 번영은 아름답게 포장되었다.
제5장 엘리언 교단과 버림받은 땅
발렌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엘리언교의 정치적 입지는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의석이 귀족과 신흥 상인, 시민대표로 채워지자 엘리언교가 나설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의 대다수가 엘리언교의 신자였고, 그들에게는 신의 사자라고 일컫는 발키리들이 있었기에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회는 엘리언 교단이 종교적인 의미로의 활동만을 하길 원해 그들의 정치적 간섭에 선을 그었다.
그러자 레하드 모테논 대사제는 의회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디아스 농장지대 근처의 땅들을 교단 소유지로 달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전쟁으로 오갈 곳 없는 이들을 보살피겠다고 했다. 그 땅은 농사짓기에도, 채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아 의회 입장에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교단은 정말 의회에 제안했던 것처럼 그 땅에 작은 마을을 짓고 교회를 세웠다.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다들 엘리언 교단의 은혜에 감사해했고, 그 땅을 축복의 땅이라 칭송했다.
그런데 돌연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칼페온은 전염병이 퍼지지 않도록 성문을 굳게 걸어 닫고, 그곳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엘리언교 사제들은 주민들의 신앙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그즈음 그 땅에서 알 수 없는 일들이 덩달아 일어났다. 이상한 힘을 쓰는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며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언제나 웃음이 끊이지 않던 축복의 땅은 점차 잊혀 망각의 땅으로, 버림받은 땅으로 불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북부 대농장의 노먼 레이트가 지원 물자를 보내도 엘리언교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번번이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6장 트리나 기사단
그 유명한 델파드 카스틸리온 군단장과 그의 심복 발크스가 바로 트리나 기사단 소속이다. 육군 외에도 해상 기사단이 존재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물어보면 10명 중 4명은 트리나 기사단이라고 대답할 만큼 인기가 좋다. 칼페온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그만큼 체계적이고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하지만 신분이 어떻든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운다면 부와 작위가 내려지는 것도 칼같이 공평하기 때문에 전쟁 기간에 많은 젊은이가 자원했다. 트리나 기사단에 유독 이름을 날린 영웅들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지금은 칼페온 각 지역에 부대가 파견 나가 있다. 트롤부터 시작해 사우닐, 거인족까지 주민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막기 위해서다.
트리나 기사단을 총괄하고 있는 델파드 카스틸리온 군단장은 현재 군사 대표로 의회에도 참석하는데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의중을 알 수 없어 가장 어려운 인물로 통한다. 지루하단 얼굴로 의회 안에서 좀처럼 끝나지 않는 탁상공론을 바라보고 있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칼페온에서 일어나는 심상찮은 일들을 파악 중이며, 특히 엘리언 교단을 주시하고 있다.
트롤 방어기지와 트리나 요새의 전투 결과 보고를 받고 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유로는 물자가 어렵다 한들 대대로 군단장을 배출한 카스틸리온 가문의 지원이 든든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고작 트롤과 사우닐에 쩔쩔 맬 정도의 무능한 능력을 지닌 지휘관들이 자신의 부하일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