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칼페온 동남부 직할령
제1장 사라진 오제 아가씨
상처가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오제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긁힌 건지 모를 붉은 생채기가 팔에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큰 상처가 아니어서 금방 아물 거라 생각했는데 연신 따끔거리면서 신경 쓰인 지 벌써 2주가 넘었다. 의사에게 보일까 싶다가도, 단정치 못하게 호들갑이라며 꾸중할 아버지가 생각나 그만두었다.
오제는 팔꿈치 부분까지 감싸는 긴 장갑을 꼈다. 새하얀 흰색이었던 장갑이 어느새 군데군데 때가 타 본래 색을 찾기가 어려웠다. 예전에는 같은 장갑을 다시 낄 일이 없을 정도로 장갑만 수백 장이었었다. 케플란에서 화려하고 귀한 것들, 예쁘고 소중한 것들은 전부 오제의 것이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예전 일을 생각하면 울음과 비통함이 아닌 한숨으로 갈무리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한때 케플란 왕국이라고 불리던 곳은 여기저기 들리는 광부들의 힘찬 곡괭이 소리와 광석을 가득 실은 수레가 지치지 않고 지나가던 곳이었지만 전쟁은 모든 걸 바꿨다. 오제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에 며칠째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고 땅만 보고 걸었다.
오제는 창틀에 팔을 걸치며 몸을 기댔다. 그러자 아래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쩌적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 낡은 창틀이 부서진 걸까 하고 놀라 창가에서 한두 발짝 물러선 오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나무로 되어 있던 창틀이 돌로 변해 있었다. 창틀을 받치고 있던 벽돌마저도 회색의 돌로 변한 채였다. 마치 애초에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처럼 거칠고 투박한 모습이었다.
오제는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상처가 났던 부분이 어느새 딱딱한 돌처럼 되어 있었다. 얼핏보면 팔 안쪽에 숨어 있던 바위가 살갗 위로 드러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제는 머뭇거리다가 상처를 살짝 만져보았다. 정말 바위처럼 단단했다. 이번에 떨리는 손으로 근처 화병의 꽃에 손을 대었다. 꽃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딱딱한 돌조각으로 변했다. 오제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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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을까. 오제는 누가 볼새라 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생각했다. 분명 지난번에 광부들이 광산을 캐다가 발견했다며 알 수 없는 돌을 들고 왔을 때인 것 같았다. 검은 광석 안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는 게 신기해 손을 대다가 팔을 긁혔다. 분명 그 돌에 수상한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광부들이 말하길, 칼페온에서 사제들이 그 돌을 보기 위해 방문했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사제들은 어떻게 알고 온거지?
드디어 아버지인 영주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오제는 노크를 하기 전 숨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심호흡하고 할 말을 정리하며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사이로 아버지의 노한 음성이 들렸다.
"약속이 다르지 않소! 흑결정 추출장을 지으면 예전처럼 생활하게 해준다더니!" | "그러게 가이 세릭 왕에게 딸을 후궁으로 들이려고 해서 의회에 밉보이시고 그러셨습니까."
가늘고 빈정거리는 듯한 어투, 오제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칼페온에서 온 늙은 사제임을 알아차렸다. 오제는 숨을 들이켜며 조심히 귀를 가까이 댔다. 그땐 그게 최선일 줄 알았다는 아버지의 말은 곧 오제의 혼담으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꽃다운 나이가 지나가기 전에 괜찮은 값을 치러 줄 신랑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시작으로 어느 늙은 귀족에 대한 이야기와 요즘엔 사제도 비밀리에 결혼을 한다더라 하는 말 사이에서 오제는 헛구역질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제2장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
칼페온 마르니 박사의 앞에 미친 과학자가 수식어처럼 따라다니기 전에 그는 천재로 이름을 날렸었다. 칼페온 근처에서 대대로 농장을 운영하던 마르니는 각종 화학 물질과 기계 장치를 만드는데 뛰어났다. 칼페온군은 그런 마르니의 재주를 높게 사 지지부진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마르니를 군에 투입했다.
그는 그때 당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제안을 내놓았는데 인간 대신 싸울 수 있는 기계 장치를 만들어 대신 싸우게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키메라를 만들어 선보였고, 나무로 된 것들이 움직이며 공격력도 상당하다는 것에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하지만 나무 조각으로 만든 것은 전쟁에 사용할 수 없었다. 마르니는 그래서 여러가지를 섞어 보기로 했다. 하피, 사우닐, 오크가 실험체로 사용됐다. 다행히 그 지역에는 기사단이 주둔해 있어서 실험체 공급이 어렵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입 부분을 꾸밀 게 없어서 나팔, 혹은 닭을 붙여놨더니 연신 시끄럽게 빼액, 꽤액 거리며 소란을 피우고 통제가 안 됐다. 소름끼치는 함성에 아군이 먼저 기절을 하겠다며 천재도 별거 아니라는 둥 핀잔만 받았다.
도대체 왜 오크에 닭을 붙여놓냐는 소리도 함께였다. 마르니는 과학의 위대함과 고차원적인 미적 감각을 몰라보는 미개한 것들이라며 혀를 찼다. 하지만 결과물에 아쉬운 점이 있었던 것은 마르니도 마찬가지라 더 쓸만한 실험체를 찾길 원했다.
그러다 마침내 마르니는 자신이 염원하던 실험에 성공하기 위한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인간의 혼을 자신이 만든 키메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 아무리 전쟁에 이겨야 한다지만 비인도적이지 않냐는 사람들과 일단 전쟁에서 이기고 보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전쟁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러자 그들에게 마르니는 더이상 필요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작업물이 바깥으로 새어나가 지탄을 받게 될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실험터를 제공하겠다는 빌미로 마르니와 실험체를 가두고 그를 미친 과학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제3장 봉화대에 놓인 유물
사우닐과의 오랜 싸움은 용맹한 트리나 기사단마저도 지치게 만들었다. 칼페온 동남부에 위치한 트리나 요새는 이제 기사단보다 사우닐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가 지쳐만 가고 아무런 소득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던 중 정찰병들이 돌아와 지휘관 프리드리 토프릭슨에게 한 가지 보고를 올렸다. 사우닐 캠프에서 사우닐들이 무언가를 지키는 듯한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지휘관은 작전을 세웠다. 며칠간 의미 없이 치고 빠지는 일을 되풀이했다. 엿새쯤 되는 날, 그날도 마찬가지로 사우닐들을 공격하는 척 돌진을 하다가 사우닐들과 검을 맞대기도 전에 다시 후퇴했다. 며칠간에 전투에서 학습을 했는지 사우닐들도 첫날처럼 무작정 후퇴하는 기사단을 뒤쫓지 않았다.
그날 밤, 트리나의 정예 부대가 어둠을 틈타 사우닐 캠프로 잠입했다. 그간 전투로 인해 승기를 잡았다 생각했는지 생각보다 경계가 허술했다. 정찰병에 보고가 있었던 곳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곳에는 공중에 떠 있는 유물이 있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이 유물이 사우닐들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있었다. 부대는 유물을 트리나 요새로 가져왔다.
프리드리 토프릭슨은 유물을 봉화대에 두고 은밀히 고고학자들을 수소문해 유물의 비밀을 밝혀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제4장 트리나 요새 신무기
트리나 기사단이 상대하고 있는 적은 만만치 않았다. 사우닐들은 지능도 좋아 투석기를 사용할 줄 알았고, 그들의 우두머리 공성 대장은 정말 이름처럼 공성의 대가였다. 트리나 요새의 성벽은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트리나 요새 내부에도 각종 장비가 구비되어 있었지만 사우닐들의 단단한 가죽을 뚫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포탄과 화살들도 금방 동이 났다. 적게 자원을 쓰면서도 효과적으로 공격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트렌트 마을에서 엔트 나무로 발리스타를 제조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지휘관 프리드리 토프릭슨은 직접 트렌트 마을로 가 발리스타를 살펴보았다. 어떤 나무보다 질 좋기로 유명한 엔트 나무로 만든 발리스타는 위력도 대단하고 정교하게 조정도 가능했다.
지휘관은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고 요새에 발리스타를 배치했다. 사우닐은 손쉽게 쓰러졌다. 그동안 왜 이렇게 고생했나 싶을 정도였다. 발리스타 한 방이면 모두 꿰뚫을 것 같았다.
어떤 적이 오더라도....
제5장 거인족과 흑결정
거인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칼페온 동남부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가장 강한 자가 우두머리가 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두머리가 되길 원한다면 언제든 결투 신청을 통해 승패를 가르고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거인족 우두머리 자리에 탄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강한 것은 당연지사고 아는 것도 많고 현명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무척 많았다. 그때에는 가까이에 있는 케플란 주민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케플란 근처에 흑결정 추출장이 들어서면서 환경이 급속도로 오염되자 거인족도 살기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거인족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랜 세월 선조들이 일군 터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아쿠와, 더 늦기 전에 다른 터전을 찾아야 한다는 탄투가 팽팽하게 대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