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메디아 남부 지역
제5장 소서러의 마을, 타리프
난투사 레투사의 가지 끝에 아직 달 조각이 걸려 있을 이른 새벽이었다. 타리프 마을의 무역 상인 브로룸이 번쩍 눈을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전신에 소름이 돋은 탓이었다. 마치 가느다란 뱀 한 마리가 발가락 끝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올라가 결국엔 목덜미를 감싸며 죄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목을 더듬거려도 만져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당연했지만 괜시리 원인 모를 불안감이 브로룸을 스쳐 지나갔다.
'아침이 되면 아혼 키루스에게 부적이라도 써 달라고 해야겠군.'
평소 신경이 예민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잠에서 벌떡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도 쭈뼛거리는 살갗을 만지작거렸다. 정체 모를 불안감은 위협적인 감각이기도 했다. 브로룸은 잠자리를 뒤척였다. 항상 봐왔던 타리프 마을의 어둠이 불안하다고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아내 베이아와 함께 따듯한 차라도 한 잔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옆자리를 더듬었다.
"베이아?"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조금 뒤늦은 때였다. 아내 베이아가 집 안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 새벽에, 말도 없이. 브로룸은 그대로 집을 뛰쳐나왔다.
"베이아, 어디 있어! 베이아!"
신발을 한쪽만 신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마을 주민들이 잠에서 깨는 건 브로룸에게 있어 하나도 중요치 않아, 그는 베이아의 이름을 외치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저 엄습했던 불안감이 현실로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안은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안 돼, 그만둬!"
마을의 광장 쪽에서 들린 날카로운 목소리는 아내 베이아의 것이었다. 브로룸은 다급한 걸음으로 광장에 다다랐다. 광장에는 난투사 레투사를 등지고 서 있는 일레즈라와 베이아가 있었다. 기묘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하얀 달빛을 받고 서 있는 일레즈라는 품에 낯선 책을 든 채였는데, 그 때문에 더욱 기묘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일레즈라가 저런 책도 가지고 있었던가? 차기 촌장으로도 언급될 만큼 지적 욕망이 뛰어난 그녀였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은 마치... 평범한 마법서가 아니라 짙고 순수한 어둠인 것만 같았다.
불안감이 또다시 브로룸을 엄습했다. 그는 늦기 전에 베이아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일레즈라가 더 빨랐다. 그녀는 여유롭게 웃는 얼굴로 지팡이를 뻗었다. 그 끝에서 기어코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온 순간이었다.
"카르티안 서를 내려놓으세요, 일레즈라!"
어쩐지 빛날 리 없는 검은 색이 눈부시다고 생각한 터였다. 아혼 키루스의 다급한 외침이 타리프 마을의 작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카르티안 서라면 난투사 레투사의 뿌리 아래 몇백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마을의 금서 아닌가!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잠들어 있다는 마법서가 어째서 일레즈라의 손에 들려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잘한 인과 관계를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브로룸의 눈앞에서 베이아의 몸이 천천히 지워지고 있었다.
"카르티안 서의 힘을 이용해선 안 됩니다! 일레즈라, 마법을 그만두세요!"
"이런, 안 돼... 베이아!"
아혼 키루스는 절박하게 소리쳤고, 브로룸은 세상을 내려놓은 듯 절규했다.
타리프 마을의 모든 소서러가 그날의 새벽을 걸고 맞서 싸웠으나 결국 카르티안 서의 힘을 사용하는 일레즈라를 멈춰 세우지는 못했다. 타리프 마을은 비통에 잠겼다.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잃었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타리프 마을의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는 카르티안 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버림받은 일레즈라를 데려왔던 날의 기억과 그녀와 함께했던 많은 날, 그리고 추억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타리프 마을의 비참함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삼 일의 어둠 직후, 타리프 마을은 소서러의 마을이 아니라 일레즈라를 낳은 마을로 불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제6장 알레즈라의 하수인
스스로 방랑도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함은 어딘가에 정착하려는 뜻이 없음이리라.
방랑도적은 자신들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메디아 남부를 떠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고, 그 전리품으로 일상을 살아갔다. 이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메디아의 방식이었고 동시에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뺏고 빼앗기며 땅을 방랑하던 그들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삼 일의 어둠이 메디아를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그들은
주둔지를 만들어 터를 잡았다. 타리프 마을과 인접한 한 고원이었다. 타리프| 마을은 안 그래도 일레즈라의 악행 때문에 뒤숭숭한 차였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한 주민이 무장을 하고 홀로 방랑도적 주둔지 근처로 정찰을 나갔으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타리프 마을의 촌장 아혼 키루스는 급히 소서러와 주민들을 모집하여 경비대를 꾸렸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방랑도적이 마을을 습격할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경비대가 정찰을 나가 방랑도적의 동태를 살펴본 결과 다행히도 그들은 당장 마을을 습격하려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경비대는 고개를 갸웃이며 방랑도적에 대해 조금 다른 정보를 내놓았다.
"인간 같지 않았어요. 새까만 피부와 빨갛게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더군요. 마치 검은 기운에 잠식된 것처럼..."
다음 날,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던 주민의 말이 타리프 마을에 모습을 나타냈다. 주인을 태우지 않은 말은 잔뜩 구겨진 종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방랑 도적단이 저들끼리의 주술을 진행하며 적은 주문서 같은 것으로 보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의 피부는 검은 어둠을 담고, 우리의 눈은 여신의 분노를 담을 것이다.
돌아가는 초승달을 보라! 탈바꿈하여 다시 태어난 우리의 힘은 속박이 아니라 충성일지니...]
제7장 자연재해의 조짐
「타리프 마을이 유독 비밀스럽고 어두운 분위기로 알려져 있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메디아 여행기를 들은 청자들은 때때로 이 질문을 건네곤 한다. 타리프 마을에서 본 것 중 가장 두려운 존재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나는 대답을 금방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한다. 그러면 다들 궁금한 표정으로 한 마디씩 덧붙이며 추측하곤 하는데, 가장 많이 나오는 후보는 바로 이 두 가지이다.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흑마법의 모습, 또는 금줄과 부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커다란 나무 난투사 레투사!
나는 일부러 두 박자 동안 간격을 둔다. 잔뜩 긴장한 얼굴들이 침을 꼴깍 삼키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한껏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을 한다.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수습 소서러이네."
그럼 다들 큰 소리로 웃으며 내 말을 농담 취급하곤 한다. "이 친구 익살이 많이 들었구먼!" 저들끼리 술잔을 짠 부딪치기도 한다. 나는 전혀 농담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과장이 아주 심하군!'이라고.
하지만 난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만약 타리프 마을에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딱 반나절만 투자해서 수습 소서러와 함께 갈기족 소굴을 다녀와 보라고.
갈기족은 아주 흉폭한 야만족 중 하나로, 내가 메디아를 여행하며 보았던 종족 중 가장 거칠고 야생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과 잔뜩 벼려진 발톱, 거칠게 부풀어 오른 뻣뻣한 갈기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모두 파괴하는 공격성을 상상해 보라! 병사도 모험가도 모두 지레 놀라 도망치기 바쁠 것이다.
하지만 내 허리만큼 오던 작은 수습 소서러가 새로 배운 흑마법을 연습하겠다며 갈기족 동굴에 들어서던 그 순간, 나는 수습 소서러와 마주쳤던 갈기족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악마를 대면한 듯한, 극한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 메디아 답사기, '황무지의 아름다움' 중
제8장 오마르 대장장이
'땅, 땅, 땅.'
하칸 데르크의 망치 소리가 용암 동굴의 여명을 가른다.
망치 소리는 아침이 오고 있다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규칙적인 울림은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불타오르는 뜨거운 용암과 대조적으로 그의 망치 소리는 청명하기만 했다.
하지만 차분히 가라앉는 망치질과는 다르게 대장장이 하칸 데르크의 마음은 번뇌로 가득 찼다. 어쩌면 휘몰아치는 번뇌와 타오르는 고뇌를 잠재우기 위한 망치질이었다. 일렁이는 대장간 화로의 불꽃을 바라보며 망치질과 담금질을 반복하다 보면 주위가 아득히 멀어지고 이윽고 자신의 존재마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물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가 이런 것일까. 마치 자기 자신이 불꽃이, 또는 망치가 된 듯했고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잡념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장인의 경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멀어졌던 주위 풍경이 가까워지고 하칸 데르크가 다시 자신의 존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때를 놓치지 않고 망치 소리 사이사이의 여백을 가르는 악몽 같은 기억들, 잡념들이 번뇌를 이끌며 고개를 들었다. 삼 일의 어둠, 최악의 재앙은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
길고 긴 어둠이 마침내 걷혔을 때, 하칸 데르크를 포함한 오마르 대장장이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벌어진 일들을 인식하기에는 현실은 너무나도 괴리감이 들었고, 동시에 압도되기도 했다. 어쩌면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메디아 왕가는 사라졌다. 그리고 첫 번째 메디아로서 오마르 대장장이들이 메디아 왕가와 맺었던, 왕가와 메디아를 위해 함께하겠다는 서약도 삼 일의 어둠이 삼켜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오마르 용암 동굴의 재해로 인해 괴물들까지 나타났고, 네루다 셴은 알티노바를 세운 후 메디아를 위해서 무기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를 수 없다며 하칸 데르크를 제외한 모든 대장장이는 동굴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마침 더 있을 이유가 없었기도 했다.
그래도 하칸 데르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바리즈 3세, 메디아의 마지막 왕족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하칸 데르크의 마음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다 타버린 재 속에서 발견한 귀한 불씨와도 같았다. 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화로로 만들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왕자가 너무 힘이 없었다. 자신도 혼자였지만, 왕자 역시도 혼자였다. 하칸 데르크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존재하는 이유가 생겼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그는 계속 망치질을 계속했다. 언젠가 주인을 찾을 무기들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약속을 지킬 그 날을 기다리며 말이다.
'땅, 땅, 땅.'
오늘도 그의 망치 소리가 용암 동굴의 황혼을 가른다.
제9장 바리즈 3세의 의지
바리즈 3세는 주민들에게 환대를 받지는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분노가 뒤섞인 적개심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나 당황한 탓에 사르마 아닌의 보호를 받으며 황급히 자리를 떴지만 아직 공포와 불안, 그리고 증오에 찬 눈동자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바리즈 3세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주민들의 분노는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공허뿐이었던 어둠은 삼 일 동안이나 이어졌고, 불안감을 기댈 지도자를 찾기 위해 달려간 메디아 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으니. 왕가는 주민들에게 안심은커녕 극한의 공포와 불안감을 안겨주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주민들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가 없었는데,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일레즈라에게 화살을 돌리는 건 더욱더 두렵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의 분노가 다시 폭발하여 또다시 어둠이 찾아온다면... 다음엔 누가, 얼마나,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대상을 잃은 주민들의 분노는 방황하다가 이내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메디아에 벌어진 비극을 듣고 허겁지겁 돌아온 바리즈 3세였다.
그는 만만한 대상이었다. 바리즈 3세를 제외한 모든 왕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들을 지키던 슈라우드 기사단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 왕자는 부담 없이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어째서 삼 일의 어둠이 내 탓이란 말인가?"
바리즈 3세 본인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어떻게 감히 왕족에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메디아 성의 빈자리를 봤을 때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매정하고 냉철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던 주민들을 보았을 때의 수치심만큼은 생생했다. 바리즈 3세는 분노했다. 그리고 그의 분노 역시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네루다 셴... 그자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네루다 셴은 알티노바의 구석진 거처라도 얻게 해준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받아야 했을 정당한 신뢰와 존경을 탈취한 반역자이기도 했다. 바리즈 3세는 현재 상황에서 메디아 주민들에게 지도자로 추대받아야 할 것은 네루다 셴이 아니라 마지막 왕족인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네루다 셴이 알티노바를 나아가 메디아 전체의 부흥을 이끌었고, 삼 일의 어둠이 닥쳤을 때 벌어진 수많은 혼란까지 잠재웠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바리즈 3세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어째서 네루다 셴이 서 있는 것인지가 중요했다.
"기필코 다시 내 자리를 되찾으리라."
마음을 다잡은 바리즈 3세의 눈동자는 알티노바 구석진 허름한 골방에서 반짝였다. 하지만 그 반짝임을 보는 이도, 알아줄 이도 없었다. 오직 문짝을 갉아먹고 있는 때 묻은 생쥐만이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