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메디아 북부 지역
제1장 골렘의 땅
골렘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는 울림의 땅. 그곳에는 모든 골렘을 이끄는 골렘의 왕, 모굴리스가 있었다. 울림의 땅의 골렘은 다른 골렘과는 달리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연성해낸 것이 아니라, 대지에 흐르는 마력이 바위와 풀에 얽히면서 탄생했다. 그래서 과거, 울림의 땅에 살았던 고대인 중 일부는 모굴리스를 자연의 지배자라 부르며 숭배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며 대부분의 골렘은 몸속에 있던 마력을 거의 소모한 탓에 움직임을 멈추고 깊은 잠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부러 골렘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그들이 깨는 일은 없었다.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골렘들이 스스로 일어난 것이다. 난폭하게 변한 모굴리스는 다른 골렘들과 함께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주민들을 무차별하게 공격했고, 심지어 자연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찾는 듯 울림의 땅 일대를 끊임없이 살피고 있다.
제2장 훼손된 고대 유적
먼 옛날, 이곳, 메디아 북부에는 고대인들이 일궈낸 고대 문명 도시가 있었다네.
그렇다면 고대 문명의 산물이라 불리던 고대 거인과 고대 거인을 움직이는 고대인의 심장, 그리고 그것을 제어하는 광원석까지 모두 한자리에 있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우리 비밀 수호단은 고대 유물과 유적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선조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바우트 석판 제작법으로 바우트 결계를 만들어, 고대의 것들을 숨기고 지켜왔네.
그런데... 얼마 전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네. 어떻게 된 일인지, 일레즈라가 결계를 이루는 바우트 석판을 찾아 깨뜨린 것이네.
그때 바우트 석판이 부서지면서 엄청난 양의 고대의 힘이 폭발했네. 여파로 고대 거인이 있는 자리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버렸지. 그러나 다행인 건, 일레즈라는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는 거네.
일레즈라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유적을 지키고 결계를 더 튼튼하게 복구해야 할 터. 그런데 요즘 골렘과 투구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 에단, 자네는 한시바삐 고대의 핵을 지키러 이곳으로 와주게. 나는 서둘러 우리 고대 드워프의 후손 중에서 제일 강력한 바우트 석판을 만든다는 대장장이, 바라탕 란서를 찾아야겠네.
- 아인 그레이드가 에단에게 보내는 편지 중
제3장 파괴된 바우트 결계
칼페온 평야에 살던 고대 자이언트의 후손, 탄투는 자신을 따르는 일족과 함께 메디아로 향했다. 긴 여정 끝에 메디아 북부, 찬란한 울림이 가득한 고대의 땅에서 그들을 맞이한 건 다름 아닌 고대 드워프의 후손이었다. 드워프 족장인 아인 그레이드는 탄투에게 말했다.
“자이언트와 드워프는 형제와 같다. 과거에 큰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하겠다”
그리고는 곧 자신들의 땅에서 멀지 않은, 고대 자이언트가 잠든 대족장의 영묘로 안내했다. 대족장의 영묘에 새겨진 고대 문자는 아직 드워프도 해독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탄투는 그것을 마치 태초부터 알았던, 익숙한 것처럼 읽어냈다.
고대의 기록을 읽어낸 탄투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자이언트라고 하기엔 작았던 몸집이 점점 다른 동족들처럼 똑같이 커졌던 것이다. 미처 다 자라지 않았던 키만큼 내재해 온 능력을 분출이라도 하듯 더 지혜롭고 더 강해졌다. 또 울림의 땅에 있던 유물들이 강한 기운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후 고대 자이언트의 후손과 고대 드워프의 후손은 고대의 힘을 지키기 위해 결탁하여 바우트 결계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유물과 유적을 수호했다.
그러나 강한 힘을 탐하던 일레즈라가 고대 유물에 담긴 힘을 흡수하기 위해 이곳에 살던 골렘과 투구족에게 검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골렘과 투구족이 난폭해져 울림의 땅을 혼란 속에 몰아넣는 틈을 타, 고대 드워프의 바우트 결계를 파괴하였다.
제4장 부패한 세력
바우트 결계를 깨뜨린 일레즈라는 이제 고대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태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울림의 땅의 유물과 유적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대의 힘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으며 곧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힘 앞에 무릎 꿇었는데, 이제 고대의 힘을 취하는 일만 남았는데, 도망쳐야만 하다니... 일레즈라는 인정하긴 싫지만 기쁨에 취하기도 전에 까딱하면 고대의 힘에 휩쓸려 지금까지 이뤘던 것들을 모두 망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버티다가 기력이 다해 칠흑 추적자에게 포위된다면 다시 이곳을 습격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비밀 수호단이 결계를 재구성하기 전에 그리고 고대의 힘을 노리는 다른 녀석들이 여길 오기 전에 어서 기운을 회복하고, 돌아와야 한다.'
일레즈라는 칠흑 추적자들에게 발각되기 직전에 악신 크자카를 섬기는 자들이 있다는 동쪽의 엘릭 사원으로 피신했다. 그곳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다. 신도들은 크자카를 소환하는 의식을 치르고 사악한 주술을 행한 탓에 몸과 정신이 썩어들어갔고, 부패한 냄새를 풍기게 된 것이었다.
엘릭 사원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회복된다는 것이 느껴졌다. 주술의 힘으로 엘릭 사원 근방까지 검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레즈라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크자카가 정말 소환된다면? 그리고 그의 힘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울림의 땅에 있는 고대의 힘은 물론 온 세상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크자카를 소환하기 위해선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니 잘만 하면 신도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크자카를 소환하는 것을 도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힘을 준다고 하면 거절하진 않겠지. 그들의 생명을 원천으로 하여 악신을 소환할 수만 있다면 마냥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레즈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신도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제5장 메디아의 재앙, 일레즈라
"고대신 크자카의 힘은 곧 나의 힘이 될 것이다."
메디아뿐만이 아닌, 이 세계 전체에 어둠을 불러오려고 하는 일레즈라. 그녀는 카르티안 서를 탐해 얻게 된 자신의 힘에 흠뻑 취해 있었다. 손짓 한 번으로 메디아 성을 불태우고 모두를 어둠 속에 잠기게 했던 위대한 힘, 그동안 아무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위대한 힘이 오롯이 자기 것이라는 희열, 전신을 관통하는 도취. 곧 모든 세상이 자기 것이 될 거라는 자신감이 잔뜩 피어나고 있었다.
엘릭 사원에는 마침 크자카를 추종하는 광신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일레즈라는 작은 기회라면 하나라도 놓치지 않았다. 엘릭 사원에서 크자카를 향한 숭배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제사장을 찾았다.
제사장은 엘릭 사원에서 유일하게 크자카와 절반의 계약을 맺은 신도였다. 그는 계약을 맺는 거로도 모자라 제 육체와 정신을 모두 크자카에게 헌납하려 들었고, 나머지 절반의 크자카가 강림하는 날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원했다. 일레즈라는 썩은 내를 잔뜩 풍기는 제사장에게 기꺼이 자신의 힘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 또한 크자카의 강림을 원한다고. 또한 제사장이야말로 크자카를 이 땅에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제사장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감복하며 일레즈라의 힘을 받아들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사장의 소환 의식이 크자카를 강림시키는 데 가장 일조를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다. 크자카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셀 수 없는 희생의 파도가 몰아쳐야 했기에. 제사장은 크자카의 강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수많은 엘릭 신도들을 이용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만한 적임자가 따로 없었다. 일레즈라는 귀찮은 일을 남이 처리하게 하는 법을 잘 알았다.
크자카의 힘, 그리고 자신이 나눠준 힘, 여기에 사악한 검은 기운까지 합쳐진 엘릭 제사장이 크자카 소환 의식을 치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일레즈라는 남은 절반의 크자카가 소환되는 즉시 카르티안 서의 금기된 주술을 이용하여 그 힘을 삼킬 계획을 짰다. 그러면 척박한 메디아뿐만이 아닌, 이 대륙 전체에 어둠이 나타나리라. 아무도 일레즈라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존하는 모든 나라의 역사에 검은 여신 일레즈라 이야기가 적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모험가가 소환 의식을 준비 중이였던 제사장을 제압했다. 일레즈라는 유리가 깨지듯 제 힘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원대한 계획이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제사장은 검은 기운에 혼이 먹혀 불완전한 존재로 추락해버렸고, 소환 의식은 다시는 벌일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