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메디아 북부 지역
제6장 돌구멍 거미
메디아 북부의 황무지에는 특이한 생물이 있습니다. 바로 돌구멍 거미라는 녀석이죠.
돌구멍 거미는 이름에 맞게 갈고리처럼 생긴 단단한 앞다리로 바위에 구멍을 내어, 그 안에서 생활합니다. 이 습성만 들으면 소심하고 겁 많을 것 같지만, 사실 척박한 환경 탓인지 돌구멍 거미의 성질은 아주 난폭합니다. 녀석들은 구멍 속에서 사냥감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인내심 많은 사냥꾼이자, 독을 사용해 목표를 사로잡는 악마죠.
돌구멍 거미의 외피는 처음엔 짙은 갈색의 나무껍질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자라면서 점점 회색빛을 띤 바위 같은 껍질로 바뀝니다. 위장에도 뛰어난 이 녀석들은 성체로 성장하면 단독으로 사냥을 시작합니다. 저기 세상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된 어린 송아지가 있군요. 돌구멍 거미가 만든 새하얀 고치가 신기한 걸까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한 걸음씩 돌구멍 거미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송아지가 오늘의 희생양이 되겠군요. 안타깝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메디아 주민들은 나무에 매달려있는 하얀 고치만 봐도 돌구멍 거미가 사는 곳임을 알고 피해가지만, 이곳 사정에 밝지 못한 모험가들은 지나가다가 돌구멍 거미의 습격을 받곤 합니다. 방금 그 송아지처럼 말이죠. 돌구멍 거미는 치명적인 신경 독을 갖고 있어, 아주 위험합니다. 신경 독에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굳어버리고, 돌구멍 거미가 뽑는 거미줄로 곧 고치가 되어버리고 말죠.
- 어린이를 위한 생태 조사서, 메디아 편 중
제7장 쿠샤 마을의 촌장
거친 사냥꾼 집단으로 유명한 세제크 사냥꾼들은 원래 울림의 땅 근처에서 살았으나, 삼 일의 어둠 이후 알티노바에 진입했다. 그들은 스스로 아술라 신의 아들이라 여기며, 울림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 사이에는, 루툼족 출신의 아돌프 버니라는 뛰어난 사냥 실력을 갖춘 자가 있었다. 처음 아돌프가 세제크 사냥꾼 집단에 들어섰을 때, 다들 초록빛 피부의 거인은 세제크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를 꺼렸다. 하지만 아돌프는 누가 뭐라던 묵묵히 사냥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위협적이고 거대한 짐승이 달려들어도 모두 아돌프의 손에 쉽게 잡혔고, 그를 시기하던 세제크 사냥꾼들도 조금씩 녹색 거인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아돌프가 비단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기 만 해서 사냥을 잘했던 게 아니라, 다양한 생물들의 습성과 특징을 잘 파악하는 날카로운 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덕에 아돌프는 단숨에 세제크 사냥꾼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러다 삼 일의 어둠 이후 몇몇 세제크 사냥꾼들이 알티노바로 떠났을 때에도, 굳건히 울림의 땅에 남아 다른 사냥꾼들을 이끌고 사냥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조금 힘들어진 점은 있었다. 왠지 몰라도 삼 일의 어둠 이후에 주변 생물들이 난폭하게 변한 것이었다. 생태가 변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질이 크게 바뀐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삼 일 동안 세상이 어둠에 잠겼을 뿐이었다.
점점 사냥이 어려워지자 아돌프 곁에 남아있던 세제크 사냥꾼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세제크 사냥꾼의 역사가 곧 끝나버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 아돌프는 다 같이 마을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마을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세제크는 세제크가 아니라며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많았다. 또 세제크 사냥꾼의 명성을 더럽힐 바에 집단에서 나가겠다며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아돌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제크 사냥꾼의 행보가 끊기지 않으려면 생존이 우선이라는 건 변함 없으니까. 그는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했고 마침내 메마르고 척박한 황무지 한 가운데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곳이 머물기 좋은 장소여서가 아니었다. 모험가들이 돌구멍 거미라는 괴상한 생물에게 둘러싸여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에선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그 틈을 타서 돌구멍 거미의 거미줄을 몰래 채집하고 있었다. 딱딱한 회색 껍데기에 날카로우면서 둔중한 갈퀴, 쉴 새 없이 뿜어내는 강력한 독,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거미줄. 아돌프는 누가 다쳐도 상관 없다는 듯이 거미줄을 채집하는 이들이 괘씸했다. 하지만 돌구멍 거미가 사람들을 해치는 걸 막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고, 곧 다른 세제크 사냥꾼들과 함께 녀석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구멍 거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운 녀석이었다. 여태 써왔던 무기들은 대부분 돌구멍 거미의 튼튼한 외피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고, 접전했다 하면 맹독을 쏘아대는 통에 온몸의 신경이 마비되기 일쑤였다. 세제크 샤낭꾼 일인자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아돌프는 사냥을 멈추고 그들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조용히 숨어서 돌구멍 거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돌프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흉포하게 굴던 돌구멍 거미들이 돌 코뿔소라는 동물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한다는 거였다. 날카로운 앞다리도, 치명적인 독도 돌 코뿔소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녀석들은 돌 코뿔소의 발길질에 꽁무니를 내빼는 것 말곤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돌 코뿔소는 사람에게는 유난히 온순한 모습을 보였다. 순간 아돌프는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돌 코뿔소를 길들일 수 있다면 어떨까?'
돌 코뿔소를 사육한다면 돌구멍 거미를 쫓는 것은 당연하고, 돌구멍 거미를 이용해 뭔가 얻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를테면 광택이 흐르는 거미줄, 혹은 튼튼한 껍질 말이다. 돌구멍 거미만 없으면 남은 세제크 사냥꾼이 그곳에 정착하여 명성을 이어갈 수도 있을 터. 아돌프는 눈앞의 돌 코뿔소를 바라보며 황무지에 작은 마을을 세우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제8장 사르마 전진기지
앞은 맹독을 품은 돌구멍 거미 뒤는 흉포하기로 소문난 소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사르마 전진기지. 사르마 아닌을 필두로 한 슈라우드 별동대가 이 위험한 곳에 오게 된 이유는 물질적인 보상이나 진급 따위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이랬다. 바리즈 왕가를 호위하던 슈라우드 기사단이 메디아의 안전을 위해 메디아 북부에서 소산과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는 주민들이 바리즈 3세 왕자를 몰아내려 하지 않을 거고, 왕자의 입지가 굳어지면서 셴 상인회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었다.
어린 바리즈 3세는 메디아를 통치하던 바리즈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그리고 슈라우드 별동대는 바리즈 왕가를 호위하는 부대였다. 즉, 슈라우드 별동대 창설과 존재의 의의는 왕가의 핏줄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내 사르마 아닌은 나라바 라쿰을 비롯한 뛰어난 병사만을 선출하여 별동대를 꾸려 소산 토벌에 자원했다.
그 이후로 삼 일의 어둠이 있을 때, 자리에 없었다는 이유로 바리즈 3세를 멸시하던 이들의 목소리도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어찌 보면 바리즈 3세를 비난하던 건 비단 삼 일의 어둠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점점 권세를 넓혀가는 셴 상인회의 앞길에 메디아의 주인이라 불렸던 바리즈 왕가가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고, 창창한 메디아의 미래를 위해선 아무래도 허울뿐인 왕가보다는 발전해나가는 상인회가 더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바리즈 왕가를 따르던 호위대가 메디아 북부의 안전을 책임져준다니 더는 왕자를 힐난할 이유가 없었다. 바리즈 왕가 없이는 슈라우드 별동대도 없었을 테니.
제9장 소산과 알티노바
메디아 북부는 우리 소산의 땅이지. 하나의 대륙에는 한 명의 왕만이 군림해야 하는 것이 절대 진리이니, 누군가와 손을 잡고 이 땅을 함께 다스린다는 건 소산의 명예를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네.
그런데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우리의 대장, 슐츠가 소산의 미래를 위한답시고 약아빠진 알티노바의 상인 놈들과 화합하려 한다는 거 말일세. 알티노바와 함께하면 소산이 더욱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오랜 시간 온몸을 바쳐 일궈놓은 땅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더러 야만인이라 손가락질하던 외지인에게 넘기겠다니 어디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스스로 무릎을 꿇겠다니 위대한 소산의 역사에 오점이 될 이야기네. 그래, 맞아. 결국 슐츠 대장도 나이를 먹으니 겁이 많아진 탓에 헛소릴 하는 거지! 이빨 빠진 호랑이는 숲을 통솔할 수 없으니 알아서 자리에서 물러난다네. 하지만 불쌍하게도 슐츠는 아직 자신이 건재하다고 믿는 모양이야.
이대로 가다간 우리 소산의 터전이 허무하게 외딴 녀석들에게 넘어갈 게 뻔해. 좋아, 자네도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는 눈빛이군! 우리에겐 힘 쓸 줄 모르는 노망난 왕은 필요하지 않아. 크크, 그럼 이제 우리가 무얼 해야겠나?
- 공클러드가 슐츠를 독살하기 전, 동료에게 한 말
제10장 검은 힘의 각성
아주 먼 옛날, 태초에 대륙의 숲 가장 높은 곳에 신비한 힘을 가진 신단수가 뿌리내리고, 실비아 여신이 자연 정령들과 함께 내려와 그 나무에 '카마실브'란 이름을 붙였다. 어느 날, 세상에 어둠이 내리자 실비아의 자손, 가넬을 따르는 한 무리가 메디아에 퍼진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울림의 땅 최남단, 언덕 기슭에 신단수의 가지를 심고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카마실브 사원, 울림의 땅 남쪽, 남부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했다는 전설 속의 사원이다.
여러 만담집에서 카마실브 사원은 온갖 꽃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있고, 그 안에서 정령들이 춤을 추며,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진귀한 약초들로 가득해 병과 상처가 없는 낙원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사원은 사제들이 정령의 힘이 담긴 결계를 쳐두어 아무나 드나들 수 없도록 꼭꼭 숨겨두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사원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고, 사원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바보 취급하기도 한다.
실은 나 또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마실브 사원은 시골의 할머니가 꼬맹이들에게나 해주는 시답잖은 옛날이야기 속 상상의 장소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어제 한 모험가를 만나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틀어졌다.
그는 남부 산맥에서 물건을 팔던 중에 마주쳤는데, 날 붙잡고 횡설수설하며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길래 처음엔 웬 미친 사람인가 싶었다.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재수 없게,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자의 입에서 카마실브 사원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카마실브 사원, 어릴 적 읽었던 책에 등장했던 지상낙원이었다. 마침 나와 그자가 있던 곳도 사원이 있다는 남부 산맥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를 진정시키고, 얘길 들어줄 테니 차분히 말해보라고 타일렀다.
모험가는 여태 흑정령이라는 것과 지내고 있었다고 했다. 흑정령과 함께하게 된 날 이후로 남들보다 강한 힘을 얻게 됐지만, 그것이 자꾸만 더 큰 힘을 원하는 탓에 가끔은 귀찮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남부 산맥을 지나쳐갈 때, 하얀 나뭇가지를 가슴에 두르고 왼쪽 허리춤에 단검을 찬 여인이 다가왔더랜다. 그녀는 흑정령이 모험가의 몸을 옭아매고 있으니 곧 영혼이 검은 기운에 잠식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말했다고 했다. 도움을 주겠다는 여인의 말에 무언가 홀린듯 덥석 뒤를 따랐으나, 당장 돌아가라고 고함을 지르며 화내는 흑정령 탓에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이 싱그러운 풀과 꽃이 가득한 사원에 누워있었으며, 마치 박하잎을 코에 댄 듯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곳이 설화 속 카마실브 사원이라는 것을 깨닫곤 기뻐했으나, 옆에 딱 붙어서 쉴 새 없이 종알대던 흑정령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고 한다. 힘을 쥐여주고 꿈에 그리던 모험의 길로 이끌어준 흑정령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는 사원의 사제로 보이는 여인들에게 흑정령을 되돌려달라고 애원했으나, 그녀들은 그를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보며 사악한 어둠은 정화해야만 하는 법이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고 했다. 쫓기듯 사원을 벗어난 뒤로, 사라져버린 흑정령을 찾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남부 산맥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사원은 온데간데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모험가가 허황된 소릴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는 내내 진심이 담긴 눈으로 무언가 그리워하듯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귀찮게 느껴지던, 언젠간 목숨을 빼앗길 수 있었다는 흑정령이란 존재가 모순적이게도 그에게 있어선 하나뿐인 인생의 동반자였던 것이겠지.
그는 얘길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는 동시에, 아까는 내가 진열해 놓은 물건 사이에서 새하얀 고약을 보곤, 사원에 비슷하게 생긴 것이 있던 게 떠올라 카마실브 사원을 아는 자인 줄 착각했다며 사과했다. 착각이었다는 걸 스스로 알았으니 굳이 그 고약이 그냥 싸구려 해열제일 뿐이라는 걸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다시 사원을 찾으러 떠나야겠다며 허탈하게 터벅터벅 걸어가던 모험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전설 속 낙원을 상상하고 있었다.
- 한 상인의 일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