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발렌시아 북부 지역
제1장 황무지 가운데의 쉼터
「당신에게 있어 쉼터란 어떤 곳인가요?
부드럽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심신을 안정시키는 곳일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생선 꼬치를 구워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편안하게 누운 채로 흘러가는 구름을 하나둘 세면서 피로를 푸는 곳일지도 모르죠.
당신이 방금 어떤 쉼을 떠올렸더라도 쿠니드의 쉼터에서는 그 모든 걸 누려볼 수 있습니다.
모험에 지친 당신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돌려 보세요.」
-노병의 협곡에 붙은 홍보 전단, '쿠니드의 쉼터로!' 에서
제2장 잘못된 신앙, 카드리 신전
황금의 땅, 발렌시아. 어떤 곳보다 아알이 오래 머무르는 곳. 태양신 아알은 드넓은 품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으며, 아지랑이의 모습으로 축복을 내려준다. 발렌시아의 독실한 아알란들이 발밑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사막 위를 걸으며 신의 부름을 찾아 고행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황금의 땅에서도 아알의 은총이 들지 않는 곳이 있었다. 한때는 기도와 찬양이 선율이 되어 너울거렸으나, 모든 것을 등진 채 추락하고 만 곳. 발렌시아 서부와 북부를 경계 짓는 카드리 신전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한데?"
폐허 기둥을 훑자 손끝에 거뭇한 가루가 묻어났다. 건물 잔해나 단순한 먼지와는 확연히 다른 결을 가진 가루였다. 앤 레이커는 가느다랗게 비치는 햇볕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고운 모래처럼 작은 입자를 가진 가루는 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짙은 색으로 변했다.
"아알의 총애를 거부하는군..."
마치 빛을 거부하는 듯한, 혹은 빛으로부터 숨어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짧은 한숨이 협곡 사이로 흩어졌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카드리 신도들이 검은 돌가루를 먹으며 영생을 꾀한다던.
최근 들어 수상한 일이 벌어진다 싶었다. 발렌시아 북부와 서부 사이를 지나가던 상인이나 주민들이 하나 둘씩 실종되고 있던 것이다. 한 번 사라진 사람들은 절대 돌아오지 않았다. 상황은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지만 카탄 군은 바심과 켄타우로스, 바실리스크 세 종족의 영역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발렌시아 서부에 군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애가 타는 건 실종자의 가족 뿐이었다. 그들은 결국 사비를 털어 실종자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앤 레이커와 같은 현상금 사냥꾼이 발렌시아 북부로 모여들고 있는 이유였다.
소문은 확실시 되었지만, 일단 필요한 건 카드리 신도가 정말 주민들을 납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였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은 가루로는 불충분했다.
앤 레이커가 카드리 폐허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부스럭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이 주변을 겁도 없이 모험하는 자는 없었다. 앤 레이커가 알고 있는 현상금 사냥꾼도 모두 이곳을 떠난 후였다. 그렇다면. 앤 레이커는 망설임 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여차하면 작은 소동이라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다! 당신이 앤 레이커 마, 맞습니까?"
소리의 방향으로 무기를 뻗으며 뒤를 도니 앞에는 어딘가 조금 어수룩해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눈앞까지 들이 밀어지는 칼날에 꽤나 당황했는지 천천히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누구지?"
"토니 베, 벤거츠입니다."
"목적은?"
"카드리 신도에 대해 물을 것이 있어... 그보다 그 무기 좀 치, 치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 네가 내 의심부터 지워줘야겠지."
남자의 손에는 굳은 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무기를 사용하는 법을 모르거나, 혹은 서툴거나.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호기심에 카드리 협곡까지 들어왔다가 길을 잃은 모험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주변을 떠도는 유랑민일 수도 있다. 앤 레이커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지만 별로 대수롭지는 않은 인간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룬 출신입니다."
"......"
룬 출신, 그 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앤 레이커는 조용히 무기를 내렸다. 토니 벤거츠의 한 마디가 시사하는 바는 많았다.
"마을을 떠난 지 오래되어 소식을 뒤늦게 접했습니다. 학문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죠. 아무것도 모른 채로... 급하게 와보니 살아남은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어 찾기도 힘들더군요."
"알아낸 건?"
"딱히 없습니다.... 당신을 빨리 찾아낸 것도 고지대에서 녀석들을 관찰하고 있겠거니 하는 추측이 맞아떨어진 덕분입니다."
"멍청하진 않네. 그럼 이건 뭐라고 생각해?"
앤 레이커는 아직 거뭇한 가루가 묻어 있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잠시동안 그걸 유심히 쳐다보던 토니 벤거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검은 돌..."
"눈치도 빠른 편이고.
"...카드리 신도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죠?"
"이곳이 습격당했을 때."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카드리 신전과 룬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건.
지금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 카드리 신전은 발렌시아에서도 아주 열정적이고 독실한 아알란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기도 소리와 아알신을 찬양하는 노래는 끊긴 적이 없었으며 발렌시아 전역을 횡단하는 아알란이 순례를 위해 찾아오곤 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결국 믿음을 저버리고 타락해버리긴 했지만.
토니 벤거츠는 시름에 잠긴 얼굴로 폐허 바닥을 쓸었다. 검은 가루가 흙먼지와 뒤섞여 나풀거렸다. 협곡 초반부터 이렇다면, 마을 중심부였던 곳으로 향할수록 더욱 참담한 모습이 되어 있을 게 뻔했다.
"넌 여기 왜 왔지?"
"저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황량한 바람 속, 토니 벤거츠는 조용히 협곡 너머 룬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수많은 고향 사람들. 선택지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고향을 되찾을 겁니다."
앤 레이커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와 같은 처지의 주민들을 모아서 카드리 신도들을 내쫓고 고향을 되찾을 겁니다."
"......"
"쉽진 않겠지만요. 무엇이든 할 생각입니다. 전술도 짜고, 남의 도움도 부끄러움 없이 받고 말이죠."
'나쁘지 않네.' 앤 레이커는 짧게 평가했다.
이후 토니 벤거츠는 협곡 위에서 카드리 신도를 한참이나 관찰하다가 룬 출신 주민을 찾아보겠다며 노병의 협곡 방향으로 사라졌다. 앤 레이커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폐허가 된 마을을 되찾는 건 대단한 장군도, 실력 좋은 현상금 사냥꾼도 아니라 어쩌면 꺾이지 않는 의지를 가진 평범한 주민일지도 모른다고.
제3장 무엇이든 가져다주는 샤카투 상단
타프타르는 평소에는 굉장히 침착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여유롭고 노련하게 대처할 줄 아는 이지만 드물게 당황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말이 무척 길어지는 버릇이 있다. 보통 이런 식이다.
"자, 잠시만요,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저한테 상의 한마디도 없이 이러시다니요? 근래에 계속 자리를 비우시더니 이런 일을 꾸미고 계셨던 겁니까? 다시 무르십시오! 누굽니까? 누가 행수님을 꼬드긴 겁니까? 혹시 제가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여서 일부러 이렇게 일을 꾸미신 거라면, 이미 잘 시간도 아껴가며 충분히 일하고 있으니 이렇게 배려 안 해주셔도 됩니다!"
샤카투는 평소 자신이 아끼는 자들에게는 상냥하고 친절하게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보통의 고블린답지 않은 위엄으로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지만 드물게 유치하게 굴어 대화하는 상대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내 마음이다!" 이런 식이었다.
순간 타프타르는 자신도 모르게 "행수님 마음만 있습니까? 제 마음도 있습니다!"라고 같이 유치하게 반박해볼까 싶었지만 덥고 건조한 날씨 탓에 대부분 탁 트인 곳에서 생활하는 터라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 싶어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뒤이어 "제가 이렇게 행수님의 체면까지 생각하는데 정말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뒷일은 또 제 감당이잖습니까", 라고 목구멍까지 솟구친 말을 가까스로 한숨으로 갈무리한 후에는 타프타르는 한층 더 기력이 쇠한 얼굴이 되었다.
샤카투가 욕심이 많았다면 작은 나라 하나 사는 것쯤은 일도 아니란 소문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오랫동안 함께한 타프타르를 위해 그의 이름을 딴 타프타르 평야를 지금 막 선물한 참이다.
제삼자가 봤다면 훈훈한 광경이었고 부러움의 대상이었겠지만 당사자인 타프타르에게는 여간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타프타르 평야가 위치한 곳이 문제였다. 발렌시아 어디서든 나라를 수호하는 군대를 만나는 것이야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으나 평야의 위치는 네세르 왕족의 둘째 왕자, 바르한 왕자가 직접 관리하는 바르한 관문 인근이었다.
왕가의 권력을 둘러싸고 어수선한 소문이 돌고 있는 시기에 괜한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지금에야 겉으로는 왕가와 괜찮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샤카투 상단이지만 한창 상단이 커져갈 때는 왕가의 압박을 많이 받기도 했었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샤카투의 재산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은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하지만 타프타르의 걱정은 금세 사그라들 수 있었는데 바실리스크와 대립 중인 켄타우로스들이 평야를 점령하면서 시샘이 아닌 안타까운 동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샤카투만이 혼자 길길이 날뛰며 당장 저 녀석들을 없애달라고 군부에 요청해둔 상태였고, 어쩌면 이 기회에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더 긴밀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타프타르는 어느 쪽에 투자를 해야 좋을지 재빨리 속으로 여러 이익에 대해 계산을 해보고 있었다.
제4장 도적단의 수장, 가하즈 투발
가하즈 투발. 누군가는 그에 대해 비열하고, 겁이 많아서 왕의 명령에서 도망쳤다고들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가 다른 마음을 먹어서 발렌시아를 배신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어찌 됐건 가하즈 투발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이전에 장군이었다라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도 많아졌다. 다만, 그의 악명은 갈수록 높아져 발렌시아에선 아이들에게 "자꾸 그렇게 울면 가하즈 투발이이 잡아간다!"라고 겁줄 정도가 되었다.
그랬기에 "투발"이란 성을 가진 로한 투발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고블린들의 왕국이라 불리는 샤카투 캠프에만 머무르는 것은 고블린들 입장에서는 비극적인 일이었고, 로한 투발의 입장에서는 짜증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캠프에 있는 술이란 술은 다 마실 기세로 덤벼들었는데 문제는 첫째, 그는 돈이 없었고 둘째, 고블린들은 애초에 가하즈 투발의 명성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랬기에 로한 투발이 샤카투 캠프에 머무를 수 있었겠지만) 셋째, 샤카투 캠프의 고블린들은 모두가 자부심 넘치는 장사꾼들이라 한 푼 없는 로한 투발에게 누가 술을 가장 비싸게 팔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이상한 도전이 시작됐던 것이다.
고블린들이 모여서 그런 작당을 하거나 말거나 로한 투발은 급작스레 직면한 위기와 싸우고 있었다. 그는 달려드는 적이 내지르는 날카로운 무언가를 가까스로 몸을 뒤로 젖혀 피해냈다.
뒤로 넘어질 뻔한 것을 몸을 옆으로 두 번 굴러 다시금 벌떡 일어나 자리를 잡으려 했을 때, 아뿔싸! 적은 어느새 로한 투발의 발치까지 와 있었다.
적은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자였는지 땅이 덤벼들 듯이 울렁거리며 금방이라도 로한 투발을 잡아 패대기칠 것 같았다. 로한 투발은 갈지자로 걸으며 최대한 그 술수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하지만 상대는 이제 로한 투발의 주변까지 마치 공간을 접듯 구겨트리고 있었다. 주변이 물결치듯 울렁이고, 하늘은 마치 로한 투발을 내리누를 듯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한 투발은 결국 참지 못하고 땅에 주저앉아 시원하게 토를 쏟아냈다.
"우엑! 어떤 고블린이야! 이딴 술을 판 게! 다른 술 가져와!"
한바탕 땅과 진한 조우를 한 로한 투발은 잔뜩 꼬인 혀로 더듬더듬 술병을 찾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쟈비가 냉큼 로한 투발에게 다가갔다. 쟈비는 로한 투발이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에게 술병을 뺏기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 서서 그의 눈앞에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찰랑거리는 청아한 소리가 잔뜩 취한 로한 투발의 귓가에도 들렸다. 로한 투발이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쟈비를 바라보며 외쳤다.
"술!"
"자, 잠시만요! 술은 물론 드, 드릴 겁니다. 그전에 제, 제 질문 하, 하나만 대답해주신다면요."
"뭔데!"
"가, 가하즈 투발쯤 되는 도, 도적이면 괴, 굉장한 보물을 가, 가지고 있겠죠?"
"가하즈? 너 지금 나한테 그놈 얘기를 꺼낸 거냐?"
로한 투발이 버럭 화내자 조금 무서워진 쟈비는 얼른 술병의 뚜껑을 열어 술 냄새가 솔솔 퍼지게 했다. 로한 투발이 시선이 다시금 술병으로 옮겨갔다.
"드, 들어 보세요. 만약 가, 가하즈 도, 도적단의 보물로 제가 마, 맛있는 술을 가져와서 로, 로한 투발 님께 드릴 수 있지 아, 않겠어요?"
"술?"
"네! 가하즈 도, 도적단 깊숙이 드,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만 아, 알려주신다면!"
"알지, 알지! 알고말고!"
장사는 최소한으로 최대한의 이율을 창출해야 하는 법이지. 쟈비는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며 가하즈 도적단 훈련지로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